EU도 러 에너지 제재 동참할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을 시작으로 서방 국가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러시아산 에너지를 보이콧하고 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원유와 가스를 분리해서 처리할 수 있는데도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규제를 망설이고 있다. 시장은 미국의 금융 제재와 국제 여론을 고려해 러시아산 원유로부터 거리를 두는 중이다. 하지만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연합(EU)은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기 현실적인 방법이 있다.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할 때 에스크로 시스템으로 대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에스크로 시스템은 일종의 거래대금 예치제다. 거래대금을 은행 등 제3자에게 맡긴 다음 나중에 판매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 같은 제안에 대해 처음에는 망설일 수 있다. 그러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국의 원유 산업이 멈출 수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원유 생산시설을 가동하지 않으면 설비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동 중단 결정에 따른 비용이 상당하다고 지적한다. 결국 에스크로 방식을 통해 서방 은행에라도 현금을 쌓아두는 게 푸틴 입장에서도 더 나은 결정이라는 것이다. 이들 시설이 푸틴의 주요 자산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서방 국가들의 목적은 푸틴 탄핵도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처럼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푸틴도 협상을 원한다는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협상 조건으로 동결된 자금의 20%를 식량, 원유 생산 장비, 의료품 등을 구입하는 목적에 한해 풀어주는 것을 제안할 수도 있다. 제1차 걸프전 이후 유엔은 이라크가 원유와 식량을 교환하도록 허락했다. 비슷한 방식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영공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이 러시아의 25배에 달하는 NATO의 직접적인 개입이 푸틴을 즉시 끌어내릴 수 있다면 고려해볼 만하다. 푸틴은 핵전쟁을 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나는 아직 그가 그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NATO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군대를 72시간 만에 전멸시킬 수 있다.

러시아를 유일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은 핵을 보유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가 핵을 사용하게 된다면 걱정해야 할 곳은 우크라이나 서부다. 러시아는 이곳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한 NATO의 주요 보급로로 생각할 것이다. 핵 위협이 현실화하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따라서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것만이 가장 좋은 선택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쿠웨이트 침공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봤지만 여전히 권력을 지켰다.

물론 서방 국가들은 푸틴을 은밀하게 제거할 수도 있다. 러시아 국민에게 최고의 결과이자 살해당한 수천 명의 우크라이나인에게도 정의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심지어 푸틴의 측근도 이에 협조할 수 있다. 푸틴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을 하는 것보다 앞으로도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을 우크라이나를 위해 측근들도 생각을 달리 할 수 있을 것이다.

푸틴은 옛 소련 정보위원회(KGB) 당시의 사고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KGB는 사람들의 약점을 잡는 데 효과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푸틴은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미국과 독일의 묵인 아래 20년 동안 힘을 쌓아왔다. 서방 국가는 이번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푸틴이 불러온 재앙에 약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글은 영어로 작성된 WSJ 칼럼 ‘Escrow Russia’s Oil Dollars Now’를 한국경제신문이 번역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