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용인반도체 차라리 포기하면 어떤가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짓기로 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장이 들어설 500만㎡ 부지에는 지난달 철제 펜스가 설치됐다. 지난해 11월 말 공장 설립 방침을 발표한 지 3개월여 만에 부지 확보가 끝났다. 기초 공사와 함께 용수, 전력 공급 등 인프라 조성 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계획대로라면 2년6개월 후엔 3나노 수준의 최선단 공정의 반도체가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때맞춰 최근 미국 하원은 ‘미국경쟁법안(America Competes Act)’을 통과시켰다. 자국 반도체산업에 520억달러(약 62조원)를 투자하는 것이 골자로, 세계 반도체 패권을 잡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유럽연합(EU)도 ‘EU반도체법’을 통해 430억유로(약 59조원)를 반도체 공급 확대를 위해 쏟아붓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처럼 세계 주요 국가들은 반도체 생산 자급력을 높이기 위해 정부, 기업,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가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만 이런 흐름에 뒤처지고 있다.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지만, SK하이닉스가 추진하고 있는 용인반도체 클러스터 착공이 지연되는 것이 대표 사례다. 2019년 2월 발표 후 3년이 넘도록 첫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과거 삼성전자의 평택 반도체 공장이 그물망 규제와 지역 이기주의에 발목 잡혀 인허가 승인부터 준공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던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부는 2026년 공장 가동에 문제없을 것이라고 공언하지만 실제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SK하이닉스 내부에선 용인 클러스터의 완공이 지연될 경우 다른 지역의 기존 팹(fab·반도체 생산공장)을 활용해 생산 능력을 키우겠다는 컨틴전시 플랜도 검토하고 있다.

최대 걸림돌은 지지부진한 토지 수용이다. 현지 주민들이 더 비싼 값을 받기 위해 토지 수용을 거부하면서 진척률이 30%에 불과하다. 최소 50%는 넘어야 용인반도체 클러스터를 착공할 수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반도체 클러스터가 추진된다는 소식에 주변 땅값이 급등하자 주민들이 감정가보다 비싸게 사달라고 요구하면서 토지 수용은 답보 상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가는 사업 자체를 그르칠지도 모른다. 토지 보상에 발목 잡힌 SK하이닉스가 대체 부지를 찾아 나선다면 용인반도체 클러스터는 실체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땅값도 급전직하할 것이다.

사업 주체인 ‘용인산업단지 SPC(특수목적회사)’는 감정평가액 외에 이달 말까지 보상에 합의하면 추가로 위로금을 더 준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하면 보상가 평균은 클러스터 발표 이전인 2018~2019년 당시 공시지가의 4배 수준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답보 상태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쟁탈전 속에 용인 클러스터 조성이 늦어지는 건 국가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토지 보상에 그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전력 및 용수 인프라 조성을 위한 인근 지방자치단체와의 인허가 협의도 난항을 겪고 있다. 취수장 설치 및 용수관로 공사를 위한 지역 민원으로 당초 계획보다 인허가가 5개월여 지연되고 있다. 외부에서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 진행 중인 지하 30m 이하의 지중선로 공사 역시 민원으로 보상 협의가 늦어지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지점은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이다. 반도체는 ‘골든타임’으로 불리는 적절한 투자시기를 놓치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K반도체 위기론’이 현실화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속도전’에 나서는 가운데 복잡한 행정규제와 지역 이기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정부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정권교체기 관료사회의 또 다른 단면이기도 하다.

자국 내에서 발목이 잡혀 사업이 가로막히면 기업은 외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자칫 용인반도체 클러스터가 기업하기 힘든 나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