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진의 논점과 관점] 갈라치는 리더십 더는 안 된다
지난달 열반한 ‘불교 지도자’ 틱낫한 스님은 저서 《꽃과 쓰레기》에서 세상 모든 것은 그물코처럼 단단하게 연결돼 있다고 강조했다. 꽃이 존재하려면 쓰레기처럼 보이는 땅의 영양분을 받아야 하고, 그 꽃도 시간이 가면 쓰레기 모습으로 땅에 떨어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신만 진리를 독점하고, 타인은 틀리고 열등하다는 생각이 평화를 깨고 갈등과 폭력을 낳는다”는 게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꼭 틱낫한의 설법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단단히 묶여 있는 초연결 사회임을 보여준 가장 극적인 사례가 코로나19 사태 아닐까 싶다. 코로나19는 2019년 말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처음 보고된 뒤 한 달 만에 20개국으로 퍼졌다. 그 후 2년여 동안 델타, 오미크론 등으로 변이를 일으키며 224개국에 확산돼 세계 인구의 5%(4억 명)를 감염시키고, 6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코로나 위기 앞에선 부국과 빈국, 열대 밀림과 시베리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제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내편 네편 정치'가 갈등 키워

이런 세상에서 나만 옳고 절대선(善)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지난 5년이 꼭 그런 모습 아닐까. 도덕적 선민의식에 매몰된 집권세력은 조국 사태와 검경 갈등 때 ‘내로남불’로 일관하더니, 코로나 대응 때도 태극기 부대와 자영업자에겐 엄격하고, 민주노총엔 느슨한 ‘이중 잣대’를 들이댔다. 경제 분야에서도 임차인과 임대인을 편 가르고, 근로자와 고용주를 차별하는 ‘입법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집권 내내 나라를 정확히 반으로 쪼개 관리했다. 치부가 드러날수록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이념과 진영 투쟁을 부추겼다.

그 와중에 귀한 시간만 다 허비했다. 인문 건축학자 유현준 홍익대 교수는 저서 《공간의 미래》에서 코로나 위기를 새로운 기회의 시간으로 정의했다. 코로나 위기로 기존 정치, 경제, 교육 등 사회 시스템 전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났다. 이 때문에 앞으로 전염병에 강하면서도 사회계층 간 양극화를 줄이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빨리 구축하는 국가가 새로운 리더로 떠오를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실 정치를 뺀 다른 분야에서의 한국 대응력은 빠른 편이었다. 교육과 경제 분야에서는 새로운 모델을 찾는 디지털 대전환이 가속화하고 있다. 감염병 대응에서도 성숙한 시민의식이 정부의 헛발질 대응을 커버하며 위기를 넘기는 원동력이 됐다. 정치만 유독 제자리 또는 퇴행이었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한 게 27년 전 일이지만 이제는 끼리끼리 정치에 그 수준을 거론하기도 힘들게 됐다.

'어른다운' 리더십 꼭 필요한 때

앞으로가 더 문제다. 바야흐로 나라 안팎이 온통 살얼음판이다. 코로나 장기화 조짐에다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 미·중 패권갈등 격화까지 겹쳐 대외 불안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성장률 하락과 부채 급증, 저출산·고령화 등 대내 리스크도 산적해 있다. 5년간 손놓은 연금·노동·교육·재정개혁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들이다.

한시 허비할 시간이 없는데도 여야 대선 캠프에서 들려오는 게 “호남 소외” “영남 역차별”(이재명 후보) “40대 포위론”(윤석열 후보) 등 또 지역과 세대를 가르는 발언들이다. 공약이라는 것도 30조·50조·100조원으로 이어지는 퍼주기 경쟁 일색이다. 통·반장선거 수준의 ‘소확행’ ‘심쿵’ 공약 타령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퍼주기 경쟁과 갈라치기 정치는 지난 5년이면 족하다. 이제는 ‘어른다운’ 리더십, 누구나 꽃도 되고 쓰레기도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아는 ‘겸손한’ 리더십을 보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