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칼럼] 다음 정부는 '독박' 쓰게 돼 있다
문재인 정부만큼 운 좋은 정부가 있을까. 숱한 정책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위기 없이 임기를 버텨온 건 과거 정부에서 넘겨받은 유산 덕분이 크다.

이 정부가 지난 4년 반 동안 곳간을 활짝 열어젖힌 것도 부족해 400조원 이상의 빚을 내가며 마음껏 돈을 쓴 것은 과거 정부의 깐깐한 재정관리 덕에 가능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이후 20년 가까이 재정당국의 첫 번째 미션은 건전재정, 균형재정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국가부채비율 40%’는 그렇게 지켜왔다.

문 대통령이 “채무비율 40%를 유지해야 할 근거가 뭐냐?”고 던진 한마디에 마지노선은 무너졌고, 선진국 평균 부채비율 80%에는 한참 멀었다는 아전인수격 해석이 더해지면서 재정 원칙은 휴지조각이 됐다. 코로나19까지 덮치면서 건전재정이란 단어만 꺼내도 마치 나라의 역적이라도 되는 양 취급받았다.

무리한 탈원전에도 전력대란 사태가 벌어지지 않은 것 역시 이명박 정부 때부터 원전을 부지런히 지어 전력 예비율을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관리해온 덕이 컸다. 정부는 탈원전을 외치면서도 전력 예비율이 위험수위에 올라 아쉬울 땐 원전과 화력발전 가동량을 늘리는 식으로 곶감 빼먹듯 했다.

혜택은 혜택대로 다 받아먹은 이 정부는 정작 다음 정부엔 부담만 잔뜩 떠넘기고 있다. 이 정부가 재정관리를 포기한 사이 국가부채는 1000조원으로 급증했고, 채무비율도 40%대 후반으로 껑충 뛰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금 추세만 유지해도 다음 정부 말에는 60%대를 넘어서게 된다. 정부는 아직도 선진국의 부채수준과 비교하면 여력이 충분하다고 강변하지만 이 대목에서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태국장 경고를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이 60~70% 이상으로 빠르게 증가할 때 국제금융시장이 한국을 미국 일본과 같이 취급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기축통화를 보유하지 못한 터키 멕시코와 같은 그룹으로 생각해 투자금을 회수할지가 중요한 문제다.”

쉽게 말해 국가부채 수준은 우리가 판단할 영역이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이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관건이 될 거란 얘기다. 비(非)기축통화국인 한국에 재정난이 덮치면 국가신용등급 하락→외자이탈→제2 외환위기로 치닫는 건 순식간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경고다.

탈원전 비용 역시 다음 정부부터 청구서로 돌아올 것이다. 이 정부는 탈원전뿐 아니라 모범생 콤플렉스에 걸린 학생처럼 국제사회에 ‘탄소중립’ 목표치를 높게 제시해 놓고, 온갖 생색은 다 내면서도 그로 인해 돌아오는 비용부담은 일관되게 나 몰라라 했다. 전기요금 인상 역시 대선이 끝나고 다음 정부에서 올리는 걸로 미뤘다. 내 임기 동안에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핌투(Please in my terms of office) 정부’가 따로 없다.

그나마 개혁이라도 해놓은 게 있다면 다행인데, 과거 정부에서 추진했던 노동 공공부문 개혁은 좌초 수준을 넘어 아예 거꾸로 갔다. 연금개혁조차 매듭짓지 못한 채 다음 정부 몫으로 넘겨진 상태다. 인기 없는 건 죄다 차기 정부로 미루는 꼴이다.

다음 정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독박’ 쓰게 돼 있다. 대권주자들이라고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오히려 한술 더 뜨는 걸 보면 아찔할 뿐이다. 여야 두 유력후보의 주요 공약에 소요되는 재정을 대충 추산해봐도 이재명 후보는 400조~450조원, 윤석열 후보는 200조원에 달한다. 이 정부에서 넘겨받은 폭탄을 터뜨리지 않고, 뇌관을 더 키웠다가 다음 정부로 넘겨주는 ‘폭탄 돌리기 정부’를 벌써부터 자처한 거나 다름없다.

다음 정부는 대한민국의 성장판이 닫히기 전 마지막 5년이다. 잠재성장률은 올해 1%대로 떨어지고, 실질성장률은 노쇠국가인 일본에도 추월당할 거란 불길한 전망도 나온다. 폭탄 돌리기 정부로는 예정된 성장판도 열지 못한 채 문을 닫을 것 같다는 두려움은 괜한 걱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