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3만원 규정'에 막힌 스타트업의 눈물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카비는 운전자 성향 파악 솔루션을 개발했다. 기존 GPS 기반 운전습관 분석과는 결이 다르다. 데이터를 먹고 자란 AI는 주변 차량과 도로, 지형지물을 모두 학습해 운전자의 사고 확률을 예측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카비는 한국판 ‘테슬라 보험’을 꿈꿨다. 테슬라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운전습관을 분류해 보험료를 산정하는 상품을 팔고 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데서 문제가 터졌다. “손해율을 낮추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라며 관심을 보이던 국내 보험사들이 어느 순간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보험업법 98조 때문이었다. 카비 솔루션을 쓰기 위해선 주변 영상을 찍는 손바닥만 한 ‘카비T’ 기기를 설치해야 한다. 현행법은 카비T를 3만원 이상 현금 및 사은품으로 규정해 ‘불공정한 물건’으로 취급했다. ‘인슈어테크(보험+기술)’ 혁신을 가져올 기술이 1년째 구천을 떠돈 배경이다. 스타트업계에서 이런 스토리를 듣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지겨운 화두’로 취급되는 게 현실이다. 바뀐 게 별로 없어서다.

코코넛사일로는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2에 참가한 업체다. AI 기반 종합 화물 모빌리티 업체를 지향하지만, 국내에선 비대면 정비 예약 등 일부 서비스만 운영한다. 회사 관계자는 “화물차 수리는 원래 시간이 오래 소요된다”며 “이 때문에 화물차 임대사업 등도 구상했는데, 유상임대 금지 규정 때문에 현재 운영하는 수리 서비스까지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CES 2022에서 원격진료와 드론, 서빙 로봇 관련 해외 신기술을 지켜본 국내 스타트업들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규제 환경이 달라도 한참 달라서다. 한 AI 스타트업은 ㎎ 단위로 정교하게 약물을 처방해야 하는데 ‘알’ 단위로 처방하게 하는 현행 규정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스타트업 대표는 “혁신 기술 쓰나미가 다가오는데 우리가 준비는 됐는지가 걱정”이라고 했다.

규제 혁신은 정치권의 오래된 화두이자 레토릭이다. 대선주자들 역시 ‘제도 혁신’에 앞장서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스타트업들을 대상으로도 직접 호소에 나서는 걸 보면 언뜻 결기마저 느껴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해 말 열린 스타트업 관련 간담회에서 “속도감 있는 규제 혁신이 중요하다”고 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네거티브 규제와 원스톱 규제 개혁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업계는 심드렁하다. ‘데자뷔’라는 평이 많다는 얘기다. 이런 발언을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큰 그림’은 이제 잘 먹히지 않는 듯하다. 진짜 설득력은 실천, 그리고 디테일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