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풀뿌리 기부문화
“당신은 왜 그렇게 가족에게 인색하세요? 그 많은 재산을 왜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않습니까?” 엄청난 기부를 하면서도 가족은 거들떠보지 않는 억만장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글쎄요. 우리 아이가 똑똑하다면 물려주지 않아도 저보다 더 잘살 것이고,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재산을 물려준들 제대로 관리할 수 있겠습니까?” ‘오마하의 현인(賢人)’으로 투자의 전설을 만든 워런 버핏의 명언이다.

그는 11세에 처음 114달러로 주식 투자를 시작해 세계 3대 거부의 반열에 오른 전설적인 투자가다. 전 세계 투자가들이 버핏의 비법이나 명언에 주목하지만, 그가 존경받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기부문화를 선도하는 자선가이기 때문이다. 버핏은 2010년부터 빌 게이츠와 함께 기부 캠페인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를 시작했고, 약속대로 재산의 99% 기부를 실천해 최근까지 약 559억달러(약 103조원)를 공헌했다. 여기에는 10억달러 이상의 거부(巨富)로서 자산의 대부분을 기부하겠다고 서약해야만 가입할 수 있는데, 28개국 231명의 회원 중 한국인으로는 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과 카카오의 김범수 등 두 사람의 젊은 기업가가 들어 있다.

이 밖에도 선진국 부호들의 기부 행렬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게이츠도 전 부인인 멀린다와 함께 500억달러 이상을 기부했고, 나치와 공산 치하에서 헝가리를 탈출해 미국에서 성공한 조지 소로스도 330억달러를 자선단체에 보냈다. 선진국뿐만 아니다. 인도 타타그룹 창업자 잠셋지 타타 회장은 1024억달러를 기부해 지난 세기 최고의 자선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부호들의 자선 기록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세계적 자선가들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미미한 수준인 것 같다. 재해나 연말연시 행사로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가족이나 모회사에 연계된 재단을 설립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유층의 사회공헌을 위한 기부문화가 정착되지 않아 가문이나 계열사와 관계없는 자선이나 순수한 의미의 기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기부단체들의 실적을 보면 국민의 풀뿌리 기부문화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하다. 예를 들어, 유니세프만 해도 45만여 명이 월 3만원 정도를 기부하고 있다. 연령도 오히려 40대가 가장 많아 비교적 젊은 층의 기부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한국의 개인 기부는 미국과 독일, 일본,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개미들의 풀뿌리 기부문화에 힘입어 한국은 190여 개 유니세프 회원국 중 유일하게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전환한 선진국이기도 하다.

우리가 1950년대 유니세프로부터 가장 많은 지원을 받았던 사실을 고려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연유로 한국이 유니세프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사례로 인용되고 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풀뿌리 기부문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