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술패권 시대 '개척형 융합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이 유례없는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강력한 과학기술의 힘이 있다. 1990년대까지 기술 자립과 추격형 연구에 치중했던 정부 지원이 2000년대 들어 과학기술 혁신 체계 구축을 통해 선도형 연구로 방향을 잡은 것이 효과를 보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과학기술을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주도형 과학기술 정책은 대체로 국가 경제 성장 논리에 충실해 왔다. 이제 과학기술의 역할을 경제 성장의 도구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현대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를 발굴·해결하고 팬데믹, 기후변화, 우주개발과 같은 초국가적 미래 이슈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과학기술의 수준은 국가 안보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국력이며 글로벌 리더십의 척도다. 과학기술 혁신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국가의 번영과 미래를 위해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국의 규모와 위상을 내각 수준으로 강화하고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 2440억달러(약 290조원)를 투자하는 내용이 담긴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의 반격도 거세다. 과학기술 혁신과 기술 자립을 최우선 전략 과제로 선정하고 2025년까지 연구개발비 지출을 매년 7% 이상 늘릴 전망이다. 유럽연합(EU) 국가들도 전략기술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기후변화와 환경, 디지털 분야 등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이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의 한가운데서 넛크래커 신세에 몰리지 않기 위해선 추격형 연구개발에서 벗어나 선도형 연구개발을 강화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 없다. 또한 정부 주도의 전략 과제보다 연구자 중심의 창의적·도전적 연구개발 과제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

연구자 중심의 선도형 연구개발 체계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학문적·기술적 배경을 가진 연구개발 생태계 구성원의 지식과 통찰력으로 중장기 미래를 예측하고 미개척 유망 과학기술 분야를 발굴해 집중 지원해야 한다. 나아가 미개척 분야의 선도자로 자리 잡고 과학기술을 사회에 안착시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과학기술 간 융합을 넘어 과학기술과 인문학, 사회과학, 법제도, 문화예술 등이 융합하는 거대융합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2008년 1차 국가융합기술발전기본계획을 시작으로 다른 선진국에 앞서 융합 연구와 교육을 중점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선도형 연구개발 체계 구축의 초석을 놨다. 2019년 정부의 융합연구개발 투자는 3조9471억원에 달했다. 융합연구 방향도 과학기술 중심의 제한적 융합에서 거대융합을 통한 해법 제시형 융합연구로 바뀌고 있다. 정부 융합정책의 민간 파트너인 미래융합협의회는 융합 교육, 연구, 산업, 정책 등 융합 생태계의 구심체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래 방향 도출과 미개척 유망 과학기술 분야 발굴을 위한 개방형 집단지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제 국제 질서는 과학기술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국이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의 희생양이 아니라 패권국으로 부상하기 위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개척형 융합연구를 통한 선도형 연구개발 전략이 그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