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초읽기 들어간 한국의 CPTPP 참여
한국은 드디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울렁증을 극복할 것인가? 세계 6위의 통상 대국임에도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거대 무역협정인 CPTPP를 애써 외면해 온 한국은 이제 가입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인가? 정부가 이달 말까지 CPTPP 가입 신청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한 정부 당국자의 발언은 결정의 순간이 임박했음을 예고한다.

CPTPP는 미국이 주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모체로 하고 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대중국 견제 전략의 목적으로 추진한 TPP는 2012년 일본이 전격적으로 협상에 참여하면서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 추구에 맞서는 미·일 동맹의 양상을 다분히 보여줬다. 2015년 10월 TPP가 타결됐지만, 2016년 미국 대선 시기와 맞물려 미국 국내 비준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양자주의를 선호하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은 TPP에서 탈퇴했다. 그럼에도 나머지 11개국은 그대로 남아 CPTPP를 결성했다. 그들을 결속한 것은 두 가지. 미국이 언젠가는 복귀할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보호주의의 역풍이 거셀수록 지역 간 자유무역협정이란 발판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판단이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통상 대국이자 무역 의존도가 선진 경제권 중 가장 높은 국가인 대한민국은 CPTPP 가입에 이상하리만큼 ‘미온적’이었다. CPTPP 참여국이 일본·멕시코를 제외하면 한국과 이미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기 때문에 CPTPP 가입의 실익이 그리 크지 않다는 논리였다. 양자 FTA의 합이 다자 FTA는 아니다. 점과 점을 연결하면 선이 탄생하지만, 여러 점을 연결하면 평면이 탄생한다. 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제적 기회와 평면이 만들어 낼 경제적 기회는 차원이 다르다. 글로벌 공급망의 중요성을 꿰고 있을 정책 당국자들이 이 차이를 인지 못 했을 리 없다. 이미 대부분 국가와 양자 FTA를 체결했기 때문에 CPTPP 참여 실익이 그리 크지 않다는 논리는 ‘미온적인 태도’를 합리화하기엔 궁색하다.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일본 기피증, 중국 눈치 보기에 유력한 혐의가 쏠린다.

문재인 정부 초기 CPTPP 가입과 관련해 활발했던 논의는 2018년 한·일 무역갈등이 전면으로 부상하면서 돌연 실종됐다. 그런데 최근 중국과 대만이 연이어 CPTPP 가입을 신청하면서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중국이 CPTPP에 가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통상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CPTPP가 요구하는 개방 수준, 경제 정책의 투명성, 제도의 합리성을 중국이 충족하려면 지금의 국가주도형 비시장경제체제로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중국도 이를 모를 리 없다. CPTPP 가입 선언을 한 중국의 속내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통상분쟁도 불사하면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호주는 최근 영국, 미국을 연결하는 새로운 3자 안보동맹인 ‘오커스(AUKUS)’를 발족시켰다.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한 이후 영국은 놀랍게도 CPTPP로 관심을 돌렸다. 2월에 가입 신청을 했고 기존 가입국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CPTPP 가입에 미온적이다. 집권당인 민주당이 거대 자유무역협정 자체에 부정적이고, 국내 정치를 극복할 리더십도 보이지 않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들과의 연합전선으로 중국을 압박하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말의 성찬에 불과하다. 중국의 노림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은 미국의 연결 고리를 약화시키려는 속셈이다.

개혁 개방에 미온적인 중국마저 고도의 전략적 계산으로 CPTPP 협상 테이블에 앉겠다는 판에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한국에 TPP 참여 기회의 창이 열렸던 2012년부터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은 TPP와 CPTPP 바깥에 머물렀다. 그사이 한국의 통상협상 조직은 외교와 통상의 연계를 중시하는 구조에서 통상의 산업적 특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한국이 협상 테이블에 앉기를 주저하고 있는 그 세월 동안 세상은 외교-안보-통상의 연계로 급선회했다. 통상 대국의 진로에 거센 역풍이 불고 있는데, 국가는 언제까지 기업의 자율 속으로 숨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