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배우 송승환'과 인연
30여 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KBS에서 문화 사업을 담당하던 시절이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공연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국내 공연계로서는 생소했던 ‘비언어적 공연’이라는 장르를 도입하며 신(新)조류로 혜성처럼 등장한 작품이 바로 배우 송승환 씨가 제작한 공연 ‘난타’다. 실험적인 도전, 낯선 장르, 게다가 언어가 없는 퍼포먼스 극을 실현해 국내에 정착시키는 과정은 퍽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난타는 1997년 처음 공연됐다. 그 첫출발을 위해,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퍼포먼스 공연 시장에 난타 기획·구상 단계 때부터 백방으로 작품의 제작을 미리 알리며, 직접 발로 뛰던 공연 제작자. 이것이 송승환 배우에 대한 개인적인 첫 기억이다.

이후 그는 배우로서의 본업은 물론 교수, 연출가, 문화예술기업 경영인으로 활발히 활동해왔다. 2011년께 한국뮤지컬협회 2대 이사장에 선출되며, 충무아트홀에 재직 중이던 나와의 인연이 다시 한 번 이어졌다. 한국 창작 뮤지컬을 활성화시키고 지원해 나가기 위해 의기투합하던 때다. 나의 첫 기억 속 모습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는 공연과 문화,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과 애정으로 가득했으며, 언제나 솔선수범하는 선배였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철저한 자기관리, 문화 정책에 대한 소신과 혜안을 가진 그는 늘 본인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역할을 찾는다. 아역배우로 데뷔해 화려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 같지만, 검소하고 소탈한 실제 그의 모습은 소박한 인간적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은 존경하는 선배이자 나의 롤 모델로 자리하게 됐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무사히 끝낸 직후, 그에게 느닷없는 시력 저하가 찾아왔다. 주변 사람 모두 그의 건강을 염려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꿈을 꿨다. 2년 전쯤 시력을 잃어가는 그를 걱정하던 내게 그가 찾아와 건넨 말은 뜻밖이었다. 그는 “이제 노역(老役)에 도전할 용기가 생긴다. 무대에서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마침 국립정동극장에서는 ‘배우’를 중심으로 한 기획 연극을 준비 중이었고, 그렇게 송승환 배우와 함께 2020년 연극 ‘더 드레서’의 막을 올렸다. 내 개인적 기억 속의 그는 공연 제작자이자 연출가이자 문화예술기업의 경영인이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배우다. 시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무대에서 투혼을 불사하는 그는 천생 배우다.

연극 더 드레서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나온다. “가끔 내 얘길 해줘. 배우는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니까.” 또 한 번 그가 배우로서 관객에게 어떤 기억으로 존재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비단 배우뿐 아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 다른 이의 기억 속에 존재할 자신의 모습을 한 번쯤은 그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