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칼럼] 탈원전 블랙리스트, 그냥 덮어둘 건가
기구한 운명의 한 공무원이 있었다. 엘리트가 모인다는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승승장구했고, 선후배 동료들로부터 신망도 두터웠던 A. 공무원의 꽃이라는 1급 자리까지 올라 남부러울 게 없었다. 그런 그한테 불행은 난데없이 찾아왔다. 2017년 대통령선거와 함께.

당시 대선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일방적 게임으로 치러졌다. 그때 문 후보가 내건 대표적 에너지 공약이 탈원전. 산업부에서 에너지정책을 총괄했던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문 후보가 당선돼 공약이 시행되기라도 하면 기존 정책을 다 뒤집어야 하기 때문. A는 수소문 끝에 공약 입안자가 모 대학 B교수라는 걸 알아내고 만남을 요청했다. B와 마주한 자리에서 그는 “탈원전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며 훈계하듯 얘기했다.

5월 대선에서 문 후보가 당선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거꾸로 B한테서 먼저 보자는 연락이 왔다. 자리에 나갔더니 B는 다짜고짜 물었다. “그때 그 생각 아직도 유효하냐”고. B의 어깨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A는 뭔가 미심쩍었으나 “당연하다”는 답을 주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문 정부 초대 산업부 장관으로 B가 임명된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인사였다. A는 직감적으로 “내 공무원 생활도 이걸로 종쳤구나” 생각했다. 실제 B가 청문회를 통과해 취임하자마자 A는 옷을 벗고 집으로 갔다. 이런 걸 관운이라고 한다면 그는 지독히도 관운이 없었던 셈이다.

B가 누군지 아마 짐작할 것이다.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이다. 지금은 월성 원전 1호기 조기폐쇄와 관련, 배임교사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그가 당시 탈원전에 반대한 이관섭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을 교체하라고 지시한 것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밝혀져 블랙리스트 논란이 불거진 걸 보면서 “저건 빙산의 일각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운규가 장관이 되고 나서 산업부 에너지라인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에너지자원실장 A가 경질됐고 산하 4개 국장급 자리도 전부 바뀌었다. 탈원전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소신 있는 산업부 공무원들은 번번이 퇴짜를 맞으면서도 세 번에 걸쳐 ‘탈원전은 무리’라는 보고서를 정권 인수위(국정자문위)와 청와대에 보고했는데, 그게 밉보인 것이었다.

이뿐 아니다. 에너지라인 씨를 말리기 위해 과거 추진했던 해외자원 개발까지 문제 삼았다. 결국 산업부 퇴직 관료들까지 줄줄이 2차 숙청대상에 올랐다. 산업부 차관을 지낸 이관섭 사장이 교체된 데 이어 산업부 출신 공기업 사장 3명이 임기를 남기고 줄줄이 옷을 벗었다. 당시 물러났던 한 공기업 기관장은 후배 공무원으로부터 통보를 받고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는 “까마득한 후배한테 그만두라는 전화를 받고 35년 관료 자존심이 무너지더라”고 했다.

앞서 백운규 전 장관은 국회 상임위에 출석해 이런 발언을 던진다. “국정철학을 같이 못 하는 공공기관장은 함께 갈 수 없다.” 이른바 탈원전 블랙리스트를 예고한 발언이었다.

문 정부 초대 환경부 장관이던 김은경이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올초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과거 정부에서 임명된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장의 사표를 종용하고, 청와대가 점찍은 내정자가 임명되도록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은 것이다.

산업부 에너지라인 숙청 과정을 지켜봤던 사람들은 산업부에 비하면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다. 박근혜 정부 초기 특정 문화계 인사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했다는 이유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2심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비하면 탈원전 블랙리스트는 너무나도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며 중대한 사안이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