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완 칼럼] '우산 의전' 논란의 가벼움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학교 친구의 엄마라며 전화가 왔다. 흥분해 있었다. 어딘가 손톱에 좀 긁힌 사진을 이어서 보냈다. 우리 아이가 그랬다고 따졌다. 아이가 폭력적인 듯 말해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무조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딸 아이를 혼냈다. 표정에는 억울함이 배어 나왔다.

다음날 같이 놀았다는 다른 친구의 엄마에게 연락했다. 아이에게 당시 상황을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잘 몰랐다고 했다. 큰 싸움은 아닌 것 같았다. 항의한 엄마가 좀 유별나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엄마들도 비슷한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 아이는 결국 전학을 갔고 엄마 때문이란 얘길 들었다. 당시엔 꽤나 활발했던 아이 성격 때문에 선입견을 갖고 야단부터 친 것을 반성했다.

10년이나 지난 아이 일을 떠올린 이유는 최근 강성국 법무부 차관의 ‘황제 우산 의전’ 논란 때문이다. 지난주 아프가니스탄 특별 입국자들이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에 입소한 직후 강 차관이 현장에서 브리핑하는 사진이 문제가 됐다.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브리핑한 10여 분간 한 직원이 뒤에서 무릎을 꿇고 우산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야당에선 “강 차관은 물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녹아내리는 설탕인가” “눈을 의심케 하는 황제 의전”이란 지적이 나왔다. 논란이 커지자 강 차관은 사과했다.

처음 사진을 봤을 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공직사회 의전은 익히 알고 있지만 누가 봐도 과한 장면이었다. 지시가 없었고, 차관은 몰랐다는 어설픈 해명은 차관이 뒤를 돌아보고 누군가 뒤에서 손으로 직원을 눌러 앉히는 영상에 의해 반박당했다. 그 후 방송국 기자가 이른바 ‘그림’ 때문에 우산 받쳐 든 직원의 자세를 낮춰 달라고 요구하는 영상이 올라왔다. 현장에 있던 기자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글도 올렸다.

비가 오는데 꼭 야외에서 행사를 진행해야 했는지, 처음부터 차관이 직접 우산을 들고 브리핑하면 안 됐는지, 남을 배려하는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지 등 다양한 비판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는 무릎 꿇은 사진만 보고 순간 판단했던 ‘차관 갑질’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상황은 직선적이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개별 장면은 전체 스토리와 다를 수 있다. 사진은 클로즈업해서 찍는 것과 배경을 다 넣어서 찍는 것, 옆에서 찍는 것과 하늘에서 찍는 것이 다르다. 현장은 하나인데 말이다. 사진뿐 아니라 세상 일들이 ‘자세히 알고 보면’ 다른 경우가 많다.

‘군맹무상(群盲撫象)’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불교 경전 《열반경》에 나오는 것으로 ‘맹인(盲人)들의 코끼리 만지기’란 뜻이다. 식견이 좁아서 자기 주관대로 사물을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시각장애인 가운데 코끼리 다리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하고, 코를 만진 이는 절구공이 같다고 하고, 상아를 만진 이는 무와 같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요즘은 ‘식견이 좁아서’가 아니라 ‘일부러’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기 편은 이유 불문하고 감싸고 남의 편은 같은 사안에도 잣대가 180도 달라진다. 범법이 드러나도 우리 편이면 애써 증거에 눈을 감는다. 정치권에서 진영 논리가 우선시되고, 편가르기가 ‘전략’이 되다 보니 사회도 닮아간다. 말은 험해지고 격(格)은 점점 떨어진다.

황제 의전을 문제삼아 차관 사퇴를 주장하는 야당 관계자나, 이번 건을 들어 ‘언론 자유 위협’이란 본질적 문제가 있는 언론중재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여당 관계자나 정치적 ‘과잉 반응’이다. ‘무릎 의전’ 논란을 계기로 과잉 의전이 사라지면 우리 사회가 진일보하는 것이니 긍정적이다. 뭐든 꼬투리 잡아 공격거리로 삼는 건 정치의 부박함만 드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