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호 논설위원
[장규호의 논점과 관점] 선거는 혁명이 아니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정확히 196일 앞으로 다가왔다. 각 당 예비후보 간 설전과 물밑 경쟁이 아슬아슬할 수밖에 없다. 상대 진영 후보를 향해 “정치 생명을 끊어놓겠다”는 극언이 나오는가 하면, 멀쩡한 당 대표를 두고 비대위 체제 운운하며 신경전이다. 한바탕 불붙을 혁명 전야의 모습 같다. 여기서 도발적 질문을 하나 던져 본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선거가 혁명이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선거를 통해 혁명을 이룰 수 있는가’란 물음이다.
'승자독식' 일방 정책으론 한계
이는 ‘선거혁명’이 민주주의 발전의 요체란 점에선 뚱딴지같은 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선거혁명과 ‘혁명’은 엄연히 다르다. 민심을 이반한 집권세력을 선거에서 완벽하게 심판하는 게 선거혁명이라면, 혁명은 기존 질서의 해체와 재정립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들 개념이 한데 뭉쳐진 역사적 선례도 거의 없다. 선거에 의한 좌파 정부 수립이 가능하지만 그 한계도 분명하다는 점을 일깨워준 1970년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의 대선 승리 정도가 그 예다.

문제는 아옌데 후보의 당시 득표율이 36.6%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이 정도 지지 기반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철폐 등 체제 변혁을 시도했으니 정권이 오래갈 리가 없다. 불행히도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는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사회주의 혁명을 너무 서둘러서다’, 거꾸로 ‘과감하게 밀고 나가지 못해서다’라는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 어찌 됐든 ‘선거 사회주의’의 한계를 보여준 실험이란 점은 분명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것은 더불어민주당이 선거 승리를 혁명 성공쯤으로 인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하지만 ‘5년 단임 대통령제’하에서 혁명적 변화를 시도할 시간적 여유가 과연 있기나 할까 싶다. 문재인 대통령을 전체 유권자의 31.7%(19대 대선 투표율 77.2%×문 후보 득표율 41.08%)만 명시적으로 지지했다는 점에서 ‘변혁’조차 얘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온갖 희생을 치르고 얻은 혁명의 계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듯하다.
이념 실험 고집하면 민심 떠나
작년 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밀어붙이기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의 초석을 놓더니 이제는 언론이 알아서 자기검열하라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시도하고 있다. 그 와중에 5·18 역사왜곡 처벌법, 대북전단금지법 같은 표현의 자유를 옭아맬 입법은 물론, 중대재해처벌법, 공정경제 3법 등 규제 일변도 법제를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2050 탄소중립’을 추진한다며 최고 실행 방안인 원전의 비중을 현 20%대에서 6~7%로 급격히 줄이는 모순을 정책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에 민주당 대선 주자들은 토지공개념 입법 등을 앞다퉈 공약하고, 기본주택 등 국가주의 정책 비전을 강조하기 바쁘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획득과 재창출인데, 정권의 임기가 짧으니 ‘대못’이라도 박고 싶은 심정일 테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 내용 자체가 개혁을 가장한 독재적 요소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마치 ‘혁명 정부’처럼 비판 목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는 민주당의 행태는 민주주의 이상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카를 마르크스는 “(보통선거제는) 기만의 수단에서 해방의 도구로 변형됐다”고 했다. 기존 체제 내 선거제도도 혁명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도그마다. 그러나 국민이 불과 몇 년간 위임한 정치 권력을 자신들의 이념 지향과 실험에 전적으로 동원해선 안 될 일이다. 4·7 재·보궐선거 참패에 담긴 민심이 바로 그런 뜻일 테다. 선거는 혁명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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