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선 차단 北에 책임 추궁 없이
통일부에 국정원까지 "훈련 연기"

송영찬 정치부 기자
[취재수첩] 북한 앞에만 서면 乙 자처하는 정부

지난달 30일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기자간담회에서 “연합훈련의 연기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예정에 없던 이날 간담회는 남북한 통신연락선이 복구된 지 사흘 만에 급하게 열렸다. 이 당국자는 “통신선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남북한 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아주 중요한 통로를 마련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 국회에선 정보위원회 전체회의가 긴급 소집됐다. 이날 “북한 비핵화의 큰 그림을 위해 한·미 연합훈련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는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의 발언이 이례적으로 공개됐다. 통상적으로 국정원장의 발언은 공개되지 않지만 이날은 달랐다.

통일부는 통신선 복원이 “김정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박 원장 발언에 대해 “어느 일방이 먼저 요청한 게 아니다”고 반박하긴 했지만 결국 두 기관의 핵심 메시지는 같았다. 13개월 만에 남북 관계 개선의 계기가 마련된 만큼 지금은 훈련을 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지난 1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와 묘하게 논리가 맞아떨어진다. 김여정은 “지금 같은 중요한 반전의 시기에 진행되는 군사연습은 북남 관계의 앞길을 더욱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기’를 강조한 통일부와 국정원은 정작 13개월 전 통신선이 단절된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6월 탈북민 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으며 모든 남북 간 통신선을 차단했다. 1주일 뒤엔 약 170억원의 국민 혈세가 투입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까지 폭파했다. 하지만 통신선을 복원하며 북한으로부터 받은 사과는 일절 없었다. 심지어 지난해 9월 서해상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 당시 북한에 항의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남북 간 통신선이 끊겨 있어서”라던 통일부는 정작 복원 뒤엔 침묵하고 있다.

정부뿐 아니라 국회에서도 김여정 담화 직후 70여 명의 범여권 의원이 연합훈련 연기를 촉구하는 연판장을 돌리고 나섰다. 지난해 6월 별도의 대북전단금지법 입법까진 필요없다던 여당 의원들이 김여정의 경고와 연락사무소 폭파 직후 돌변해 법안을 밀어붙였던 지난해 12월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외교·안보 부처는 물론 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까지 연합훈련을 코앞에 두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 신중히 협의하라”는 모호한 발언으로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복원된 통신선을 통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기는커녕 정부는 되레 연합훈련 중단, 개성공단 재개, 대북 지원 등을 연거푸 거론하고 있다. 북한 앞에만 서면 을(乙)을 자처하는 정부의 모습이 답답하다 못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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