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개도국 습성 vs 선진국 품격
세계 어디서도 한국을 개발도상국이나 약소국으로 보지 않은 지 오래다. 국내총생산(GDP·10위), 무역 규모(6위) 등 경제 역량은 톱10에 든다. 1인당 소득(27위)에선 지난해 G7의 하나인 이탈리아를 넘어섰다. 한국의 수출 상대국은 233개국(6월)에 달했다. 도쿄올림픽 참가국(206개), 코카콜라 판매국(220여 개)보다도 많다. K팝 등 한류는 핫한 장르가 돼 세계로 퍼져나간다. 국토면적이 세계 107위지만 경제영토, 문화영토는 결코 좁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작게 보는 경향이 있다. 4대 강대국(미·중·일·러) 틈바구니에서의 굴곡진 역사에다 식민지, 전쟁, 빈곤의 시절을 겪은 탓일 것이다. 정치인들조차 입버릇처럼 ‘우리 같은 서민’이라고 하듯, ‘우리 같은 개도국(약소국)’이란 고정관념이 언어 습관에 배어 있다. 내부 인식과 외부 평가의 괴리가 크다.

이달 초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한 것은 여러모로 곱씹어 볼 의미가 있다. 1964년 UNCTAD 설립 이후 처음이다. 여기에 ‘국뽕 한 바가지’ 얹으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타공인 선진국이 되기 위한 경제적 필요조건만큼 정신적 충분조건을 갖췄는지 돌아보자는 것이다.

개도국 시절에는 부지런히 쫓아가고, 잘 되는 나라를 따라하고, 때로는 베끼면 됐다. 설령 마찰이 생겨도 개도국이니까 대강 넘길 수 있었다. 미국 일본 독일 등 롤모델도 많았다. 자원 빈국이지만 인적자원만큼은 부국이었던 덕이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과 정신적 성숙 사이에는 뚜렷한 시차가 존재한다. 개도국에서 자란 산업화세대나 586 등 민주화세대나 그 행태가 ‘개도국 습성’을 못 벗어난 점은 대동소이하다. 남들보다 약삭빠르게, 하나라도 더 챙기고, 요령껏 행동하는 걸 잘 사는 것으로 여겼다. 빽, 연줄, 뒷문, 무대뽀, 패거리, 치맛바람 등이 그 부산물이다. 조국 사태도 따지고 보면 그런 ‘개도국 습성’의 집약이 아닐까.

개도국 습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끊이지 않는 안전사고다. 그때마다 ‘안전불감증’ ‘예고된 인재(人災)’란 비난만 무성했을 뿐, 고치지 못하고 또 터지길 밥 먹듯 한다.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급급하고 보이지 않는 근본원인엔 소홀하니 ‘예고된’ 것조차 예방·대처할 역량이 부족한 것이다. 매사 ‘늑장대처, 대증요법, 땜질처방’이 반복되는 이유다. 25번의 대책을 내고도 집값과 전·월세를 절절 끓게 만든 것도 ‘민생 안전사고’란 점에서 다를 게 없다.

그래도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인의 아비투스(집단적 습속)는 확연히 달라졌다. 교통사고가 나면 목청 돋우며 삿대질하던 풍경부터 거의 사라졌다. 병목구간의 순차적 진입, 한줄 서기, 출입문 잡아주기 등도 익숙하다. 그 나라 수준을 보여주는 공중화장실이 확 변했다. 내로남불에 분개하고, 갑질이나 권력 남용에 힘없이 당하지도 않는다. 선진국에서 자라난 젊은 세대가 성장하면 보다 공정하고 세련된 나라를 만들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옳고 그름 위에 진영 논리, 법치 위에 떼법, 과학 위에 미신·음모론, 매뉴얼 위에 요령인 나라가 선진국일 수 있을까. 술에 관대한 만큼이나 ‘우리 편’의 거짓말에 관대하다 못해 결사옹위까지 한다. 해외 시각에선 소득 3만달러인 부국이 자유와 인권 같은 인류 보편 가치에 둔감한 것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한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이 지금도 의미 있으려면, 북한 홍콩 신장위구르 미얀마 등지에서 벌어지는 자유·인권 탄압에도 공분을 느껴야 마땅하다.

물론 구미 선진국들도 허다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도 선진국으로 불리는 것은 사회 주류와 국민 다수가 선진 시민의 ‘품격’을 유지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개도국 습성을 넘어선 선진국 품격은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줄 아느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적 토픽이 된 MBC의 역대급 올림픽 방송사고도 역지사지 결여가 한 원인이다. 이래선 아무도 존경하지 않는 ‘졸부국가’로 치부될 것이다.

이젠 우리가 따라갈 나라보다 우리를 따라올 나라가 훨씬 많아졌다. ‘깨어보니 선진국’이란 생각은 착각이다. 건국 후 70여 년간 보다 나은 삶, 보다 발전된 나라를 위해 부단히 달리다 보니 어느덧 그 언저리에 진입했다. 나라가 선진국인지는 국민 개개인이 선진 시민의 품격을 지닐 때 비로소 실감하는 ‘큰 바위 얼굴’ 같은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디쯤 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