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자유주의의 敵은 제로섬 마인드
대기업 이익을 중소기업에 나눠주라는 이익공유제, 개인의 택지 소유 제한, 기본소득 재원을 위한 토지보유세 인상, 납품업체·대리점 등에 단체결성 및 협상권 부여 등 여권 대선주자들의 정책을 뜯어보면 공통점은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의 정치로 모두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생각이다.

억강부약 정치는 현 정부의 핵심이 아니던가! 국가는 약자를 포용해야 한다면서 빚을 얻어서까지 추진한 퍼주기식 복지정책, 소득주도성장을 내걸고 밀어붙인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임대료·주택가격 규제 등은 억강부약 정책이다. 그러나 집권 4년이 지난 지금 그런 정책은 집·전셋값 폭등, 저성장, 일자리 참사, 양극화 심화, 1000조원의 빚 등 온갖 부작용을 낳았고 약자의 삶은 더 어려워졌다.

실패한 억강부약 정책을 대선주자들이 답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의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주목할 건 억강부약 정치가 전제한 세계관이다. 그건 제로섬(zero sum) 세계관이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딴 돈과 잃은 돈을 합하면 제로가 되는 게임이다. 세상의 이치(理致)란 어느 한 사람의 소득·재산 증가는 다른 사람의 부의 감소를 초래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좌파의 제로섬 사유(思惟)는 파이의 규모는 고정돼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사회주의가 인센티브를 무시하고 파이 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다. 노사갈등뿐만 아니라 인종·계층·젠더 등 오늘날의 갈등 버전도 제로섬 마인드의 탓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세계는 제로섬 세계가 아니다. 어느 한 사람이 부자가 된 것은 타인들에게 그 이상의 가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부자가 된 건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해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갔기 때문이 아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인터넷 회사를 세운 사람들 각자는 엄청난 부자가 됐지만 우리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은 게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우리가 사는 시장사회는 불완전하지만, 여권의 좌파 세력이 보는 것처럼 제로섬 사회는 아니다. 제로섬 사고에서 비롯된 모든 정책의 실패가 예정된 건 그래서다. 문재인 정부의 모든 경제정책이 참혹하게 실패한 이유다.

흥미로운 건 제로섬 세계관의 원천이다. 우리의 정신 성향은 생물학적 진화사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인간 정신이란 그런 환경의 결과라는 하이에크의 진화론적 인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정신이 개발됐던 제로섬 세계에서 부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훔치는 것이었다. 투자도 기술 개발도 없었다. 새로운 돌도끼를 발명해 부자가 될 가능성도 없었다. 자연이 주는 먹거리는 고정돼 있었다. 그런 사회는 나눔이 최고의 덕목이었고 유대감, 그룹에의 애착 등을 통해서 조정되는 수렵채집의 원시사회였다.

부자와 강자에 대한 편견은 현대에 사는 우리의 본능적 정신구조의 한 부분이다. ‘자연인’의 눈으로 볼 때 이윤은 착취의 결과요 자본은 불로소득의 원천으로, 그리고 성공한 기업은 착취와 기만 폭력의 결과로 보인다. 그래서 부의 격차는 근본적으로 공정하지 않다는 목소리는 그런 편견을 반영한 것이다.

현 정부 억강부약의 모든 정책이 완벽한 실패로 귀결됐음에도 대선주자들이 그런 정책을 지속하려는 이유도 사실상 지지층의 미성숙한 제로섬 세계관 때문이다. 그런 세계에서 진화된 정신구조에는 시장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시장은 약육강식의 장(場)이요, 시장의 교환은 제로섬 게임이고, 소득 불평등은 약자에 대한 착취와 무자비한 공격의 결과로 비친다.

그러나 주지해야 할 건 척박하고 야만적인 제로섬 사회를 극복하고 문명화된 풍요로운 열린 시장사회를 가능하게 한 건 소유 존중, 정직성, 자기 책임, 법 앞의 평등과 같은 도덕적 기본원칙의 자생적 등장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원칙은 읽기, 쓰기, 말하기처럼 후천적으로 배워 학습한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 적(敵)은 제로섬 마인드다. 풍요로운 자유 사회를 확립하고 유지하려면 배우지 못해 미성숙한 야만적인 인간을 개화시켜야 한다. 이게 자유주의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