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중앙은행이 항상 잘한 건 아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역대 가장 행복한 한은 총재일 듯하다. 외부에서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우선 71년 한은 역사상 사실상 첫 연임 총재다. 과거에도 연임 사례가 있었지만 당시엔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겸임하지 않아 지금과는 위상이 달랐다. 이 총재가 능력과 안정감을 인정받은 덕이다.

통화정책을 함께 이끌어가는 금통위원들도 역대 어느 금통위와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는다. 이승헌 부총재는 이미 한은에서 검증받았다. 고승범 임지원 조윤제 서영경 주상영 위원 모두 각 분야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는 경제학 박사들이다. 이 가운데 서영경 금통위원은 한은 출신으로, 이 총재가 외부 출신 금통위원 중 한 명만 잘 설득하면 본인 뜻대로 통화정책을 펼 수 있어 보인다.

이주열 총재가 행복할 것 같은 가장 큰 이유는 외부의 간섭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최근엔 한은의 통화정책에 큰소리로 왈가왈부하는 정치인이나 관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총재는 이 대목에선 이성태 전 총재에게 감사해야 할 듯하다. 작고한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상고 4년 선배인 이성태 총재를 발탁하며 한은은 이성태 총재에게 맡기자고 한 것이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어지는 것 같다.

훌륭한 중앙은행 총재가 뛰어난 금통위 멤버들과 함께 독립적으로 통화정책을 짜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을까. 그간 미국이나 한국의 역사를 보면 꼭 그렇다고만 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무난하게 통화정책을 폈지만 엄청난 실수도 저지른 게 중앙은행이다.

대표적인 게 대공황 시기였던 1931년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상이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이 약간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Fed는 금유출 방지 등을 위해 금리를 올렸다. 그 결과는 세계 2차대전 때까지의 길고 긴 공황이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아예 중앙은행의 통화량 조절 실패, 즉 통화량 축소 때문에 대공황이 왔다고 봤다.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었다. 이 때문에 중앙은행은 통화를 일정하게 꾸준히 공급하는 작은 역할만 하라고 주문했다. Fed는 2000년대 들어 부동산 버블을 만들어 세계 경제를 글로벌 금융위기로 몰아넣은 장본인으로도 손가락질받고 있다.

한은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 금리를 올려 아직까지도 비판받고 있다. 2008년 8월이다. 유가가 뛴다는 이유로 기준금리를 연 5.0%에서 연 5.25%로 인상했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는 다음달 터졌다. 한은 내부에선 2009년 2월 0.5%포인트 더 내려 연 2.0%로 낮춘 것 역시 실수라는 반성도 있다.

한은은 최근 들어 기준금리 인상 사인을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가 좋아지고 있으며 물가가 오르고 있어 금리를 올려야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실질 성장률이 -1%였는데 올해는 4%로 전망되고 있으며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최근 2%를 넘는 상황인 데 비춰 현재 연 0.5%의 금리는 너무 낮다는 게 한은의 시각이다. 하나 더 더하면 가계부채가 계속 늘어 금리 인상으로 대응할 필요도 있다고 보고 있다.

한은의 이 같은 판단은 대체로 공감대를 얻고 있다. 문제는 시기다. 이주열 총재는 가급적 그 시기를 앞당기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먼저 금리 정상화라는 표현을 꺼냈다가 연내 인상 논의로, 이어 8월부터는 인상 논의로 바꿨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한은의 생각과는 상당히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델타 변이가 기승을 부리면서다. 한은 전망처럼 델타 변이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연내 인상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델타 변이가 진짜 문제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때문에 금리 인상에 너무 조바심을 낼 일은 아닌 듯하다. 이주열 총재는 내년 3월 퇴임 전 금리 인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낄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보다 통화정책을 정말 잘 이끈 한은 총재로 기록되는 게 더 큰 명예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