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인왕제색도'에 숨은 사연들
270년 전인 1751년 7월 17일. 지겹던 장마가 1주일 만에 멎었다. 겸재 정선은 밖으로 나와 인왕산을 바라보았다. 웅장한 암봉 아래 채 가시지 않은 운무가 산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그는 가장 큰 종이를 펼치고 조선 최고 진경산수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렸다. 크기는 가로세로 138.2×79.2㎝, 그의 유작 400여 점 중 최대작이다.

이 그림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우선 그림 오른쪽 아래의 기와집은 누구 집일까. 그의 절친이자 당대 유명 시인 이병연의 집이라는 설이 있다. 이병연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얘기다. 겸재의 외조부 박자진의 집, 그림을 자주 주문하던 판서 이춘제의 집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다 겸재 자신의 집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림으로 자수성가한 그가 말년의 대표작에 자기 집을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남에게 주지 않고 보관한 점, 제작연대를 일부러 명기한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린 장소는 그가 살던 옥인동 남쪽이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언덕이라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인왕산 봉우리는 흰색 화강암인데 정상의 치마바위를 시커멓게 칠한 것도 흥미롭다. 묵찰법(붓을 쓸어내리는 먹칠법)으로 덧칠을 하며 바위를 어둡게 표현한 이유가 따로 있었을까. 사실 바위가 비에 젖으면 어두운 빛을 띤다. 그런 점에서는 ‘실제 모습’(진경)에 더 가깝다.

치마바위에는중종비 단경왕후 신씨의 비애도 깃들어 있다. 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은 단경왕후의 아버지가 연산군과 처남 매부 사이라며 ‘적폐 청산’을 외친 반정 세력에 밀려 왕후를 폐출했다. 쫓겨난 왕후가 이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 중종이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해서 치마바위로 불린다.

그림 위쪽의 산봉우리가 약간 잘린 듯 보이는 데에도 사연이 있다. 원래 그렇게 그린 게 아니었는데 그림을 보수하고 표장하면서 잘려나간 것이다. 이 걸작이 전해진 이력 또한 특별하다. 겸재의 손자로부터 당시 권력자 심환지에게 넘어갔다가 일제강점기 서울과 개성을 거쳐 서예가 손재형에게 간 것을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사들여 보관했다.

그 작품이 국가에 헌납돼 어제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가격도 1000억원대로 국내 회화 중 최고 수준이니, 명성만큼이나 화제가 끊이지 않는 걸작임에 틀림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