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나타샤와 금작화
친구들에게 끌려 온 듯 어색한 모습으로 문 앞을 서성이던 한 청년이 있었다. 부끄러운 듯 방황하던 그의 시선은 아리따운 여인의 맑은 눈빛에서 멈췄고, 그들은 마치 영화처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운명은 그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청년은 시인이자 교사로서 출발한 참이었고, 여인은 기생이었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대에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시가 돼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전한다. 남자는 그녀를 나타샤로 추억하며 시를 남겼고, 여인은 평생 수절하며 서울에 큰 식당의 주인이 됐다. 시인은 백석, 기생은 김영한.

그녀는 부자가 됐지만 백석에 대한 사랑을 간직했고, 한 스님이 쓴 책에서 깨달음을 얻어 모든 재산을 기부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됐다고 한다. 그 스님이 법정스님, 책은 ‘무소유’였으며, 그의 재산은 지금의 ‘길상사’가 됐다.

그녀는 당시 시가로 1000억원에 달하는 재산 기부가 아깝지 않냐는 질문에 “백석의 시 한 줄이 돈보다 더 가치 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준 그의 시 한 줄이면 족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은 시간이 흘러 가장 아름다운 사찰의 숨겨진 추억이 됐다. 길상사 입구 왼쪽에 흐르는 작은 계곡의 물소리는 마치 두 사람이 사랑을 속삭이듯이 부드럽게 흐른다.

길상사 창건식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했고 그 보답으로 법정스님은 명동성당 미사에 참석했으니 종교 간 화합과 동행의 초석이 그때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물소리의 속삭임을 따라 법정스님이 마지막까지 기거했다는 진영각에 오른 두 분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백석과 김영한처럼 사랑의 대화를 나눴을까, 두 종교가 화합해 사랑과 자비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약속했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예쁜 화분이 보였다. ‘금작화’라고 씌어있고 꽃말은 ‘겸손’이었다. 법정스님이 있던 곳에 어울리는 꽃이라고 생각하던 중 나타샤가 꽃으로 환생한 게 아닐까 싶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가 된 나타샤가 겸손의 꽃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서울이 느껴지지 않는 길상사, 금작화로 전해지는 나타샤의 향기와 법정스님의 숨결을 느끼면서 생각한다. 작은 일 하나에도 흥분하며 저주를 보내는 인터넷상의 말들,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 가혹한 언행과 폭력들, 광풍 속에 길 잃은 청춘들.

코로나로 병든 숱한 영혼에 길상사의 계곡 물소리와 금작화의 꽃내음을 권한다. 생각과 생김새와 이념과 종교의 다름으로 분열되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며 비난하는 이들에게 백석과 나타샤의 사랑 이야기, 법정스님과 추기경이 맞잡은 손에서 풍기는 겸손의 꽃내음을 권한다.

죽어 한줌 흙이 되면 아무것도 의미 없으니 사랑하라고, 이해하라고, 겸손하라고, 그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분열과 이기의 광풍을 잠시 떠나 옛사람들의 사랑과 이해와 용서의 이야기에 마음을 기대보길 바란다. 잠시 따뜻한 이야기의 품속에서 쉬었다 가길 권한다. 우리에겐 가끔 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