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강타한 능력과 공정
타고난 조건 vs 후천적 노력
무 자르듯 구분 명확지 않아

대통령 아들이 '세계적 작가(?)'
실력 빼면 '운·빽·배경'만 남아
"골품제보단 능력주의가 낫다"

오형규 논설실장
[오형규 칼럼] 어디까지 운이고, 어디까지 실력일까

어디까지가 운이고 어디까지가 실력일까. 빤해 보이지만 막상 따져보면 쉽게 답하기 힘든 문제다. 예컨대 부모 잘 만난 것, 빈국이 아닌 부국에서 태어난 것은 선천적 운에 해당한다. 그러나 머리 좋고, 끈기 있고, 강한 성취욕을 지녔다면 그건 ‘타고난 조건’일까, ‘후천적 노력’일까. 두뇌, 성품, 신체 능력, 외모, 인내심 등도 부모 유전자로 물려받은 것 아닌가.

국졸(國卒) 정주영이 세계적 기업을 일군 것까지 노력과 실력이 아니라 운이라고 주장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운이 작용하는 요소를 제거하다 보면 개인의 노력은 사라지고, 모든 격차를 태생적 조건으로 치부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정후는 부친(이종범)에게 물려받은 재능만으로 타격 천재가 된 걸까. 류현진 손흥민 김연아의 성취도 부모 덕인가.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게 과연 공정한 것인가.

이른바 능력주의(meritocracy) 또는 실력주의가 2021년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36세 0선(選)’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공정한 경쟁’을 전제로 띄운 화두가 《조국의 시간》이 재소환한 조국 사태, 학력까지 포함한 차별금지법과 충돌하며 논쟁의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형국이다. 내로라하는 논객치고 한마디 거들지 않은 이가 없고, 대통령까지 “능력과 경쟁이란 시장지상주의 논리를 경계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비판론자들은 능력주의를 약육강식, 승자독식, 경쟁지상주의, 엘리트주의, 귀족주의라고 비난한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출발점이 다른데 실적과 결과만 놓고 더 많은 보상을 당연시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라고 비판한 것도 종종 인용한다. 상위 20%가 나머지 80%를 배제하는 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는 불공정하고 배격할 대상일까. 2030은 반대로 생각한다. “바꿀 수 없는 부모와 배경 말고,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 성(城) 밖에 사는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 청년들이 언제 결과의 평등을 요구했나.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겨뤄볼 기회라도 달라는 것뿐이다.

지난주 끝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비씨카드·한경 레이디스컵에서 뜻밖에 우승한 임진희를 보자. 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처음 골프를 접한 그는 빠듯한 가정형편에 고교 때에야 비로소 본격 시작했다. 2부투어를 전전해 작년 상금랭킹이 85위(1986만원)에 불과했다. 후원사도 대기업이 아닌 대리운전회사다. 철저한 무명인 그가 기댈 게 ‘하루 1000번 스윙, 남보다 30분 더’라는 지독한 연습 말고 뭐가 있었겠나.

능력과 실력의 반대는 운, 빽, 배경 같은 것이다. 능력주의의 대척점에 연고주의, 정실주의, 혈통주의가 있다. 히딩크의 성공도 그런 혈통 연줄 출신 등을 싹 다 무시한 결과였다. 혈통이 인생을 좌우하던 신분제 사회에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었다. 지금도 스펙 품앗이, 연공서열, 직원 자녀 우선채용 등 숱한 시도들이 있다. 분명 빽인데 종종 실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능력주의 논란 속에 대통령 아들의 행보가 국민을 당혹하게 한다. 그는 문화예술위원회 지원금 6900만원을 받은 사실을 스스로 공개하며 자랑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정치권 공격이 오히려 작가로서의 내 실력을 부각하는 결과만 낳고 있다”고 받아쳤고, 청와대 수석은 ‘세계적 예술가’라고 추켜세웠다.

이런 구절은 기억해두기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상태로 인생을 시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며 산다.”(대니얼 리그니, 《나쁜 사회》) 아예 타석에 설 기회조차 없는 젊은이들은 차라리 능력대로 경쟁해서 소수라도 용이 되는 게 낫다고 여긴다. 믿을 거라곤 그나마 빽이 안 통하는 수능, 공무원시험 같은 것뿐이란 것이다.

성문을 닫아걸고, 성벽을 더욱 높이며, 사다리를 걷어차면서 공정과 정의를 말하는 건 ‘악어의 눈물’일 뿐이다. 586 기득권은 신라 골품제에까지 비유된다. 운동권 경력에 따라 성골 진골 육두품으로 나누고, 좁은 인재풀로 ‘불공정 카르텔’을 만든다는 얘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는 손톱만큼도 없기는 정치권의 좌우가 다르지 않다. 골품제 사회보다는 능력주의가 낫다고 청년들은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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