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2030세대의 분노 그리고 의무
2030세대는 지금 정치적으로 분노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밝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그간 두 번 심각한 갈등의 고개를 넘었다. 동서 간 지역갈등, 보수와 진보 사이의 이념갈등이다. 이 두 가지 갈등이 우리 사회를 한때 심각하게 갈라놓기는 했지만, 국가 발전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보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한강의 기적이 가져온 산업화라는 열매를 맺었으며, 진보는 그 과실에 민주화라는 향기를 담았다.

지난달 워싱턴DC에서 벌어진 우리 기업인에 대한 ‘생큐’ 잔치, 그리고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의 특별 초청을 보면 바깥세상에서 보기에 한국의 미래는 아주 밝은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젊은 세대의 앞날에 족쇄를 채우는 문재인 정권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제3의 갈등, 즉 세대 간 갈등이 심각하게 싹트고 있다.

우선 당장의 나랏돈 퍼주기 잔치(!)를 누리는 기성세대와 미래에 이 모든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할 2030세대 사이의 갈등이다. 스웨덴의 고질적 복지병을 치유한 라인 펠트 전 총리는 한국의 재정건전성에 대해 경고했다. 다가오는 초고령사회에 대비해 지금부터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 국가채무를 줄이고 재정건전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스웨덴도 의료보장 수준을 낮추고 연금 혜택을 축소했는데, 우리나라는 정확히 반대로 치닫고 있다.

‘우선 쓰고 보자’는 식의 재정 적자는 결국 2030세대가 부담해야 할 국가채무를 천문학적으로 늘릴 것이다. 모든 것을 국가가 부담하겠다는 문재인 케어는 보수정권 때 겨우 흑자로 전환해 놓은 국민건강보험 재정수지를 3년 연속 적자 행진으로 바꿔 놓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로 질주하고 있다. 지난 4년간의 무책임한 실책을 바로잡지 않으면, 36세인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평생 열심히 세금 내고 의료보험료를 내봤자 70대 후반이 되는 40년 후 국가가 해줄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국가재정은 이미 거덜 나고, 국민건강보험은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고 싶어 하는 2030세대와 노동시장에서의 기득권자 사이 갈등이다. 제정신 차린 정부라면 노동시장에서 기득권자들이 양보하도록 유도해 2030세대에게 취업의 문을 넓게 열어줘야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집권 세력은 반기업·친노조 정책으로 강력한 노조의 보호를 받는 기득권자를 옹호하고 있다. 약한 자의 편에 선다는 진보정치의 엄청난 위선이다.

독재국가에서 국민이 고난을 당하면 국민에게는 그 책임이 없다. 국민이 스스로 지도자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민주국가에서 지도자를 잘못 뽑아 요즘처럼 국민이 괴로우면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선거권자인 국민에게 있다.

프랑스에서는 무능한 진보와 무기력한 보수를 거부하는 마크롱 혁명이 일어나 무너져가던 프랑스를 되살리고 있다. 60여 년 전 봄 이 땅의 젊은이들이 독재에 분노해 항거했듯이, 2022년 봄에는 2030세대가 무책임과 위선의 정치에 분노하고 뭉쳐서 민주선거혁명을 해야 한다.

우선 2030세대는 그들을 희생양으로 만들 네 가지 유형의 정치인을 2022 대선 판에서 몰아내야 한다. △시장이 아닌 재정으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몽상형 △산업과 기업을 육성해 국가의 부를 창출할 줄 모르고, 나랏돈 쓰는 데만 도통한 재정파탄형 △대한민국의 미래, 다음 세대의 행복이 아닌 다음 선거, 선거권자의 행복에 올인하는 선거 지상주의형 △진정한 국민이 아니라 도그마 집단인 ‘우리 편 진영논리’에 빠진 내로남불형이다.

우리나라에서 진보 성향의 4050세대, 그리고 보수 성향의 60세 이상 세대가 유권자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한다. 대강 보수와 진보가 반반으로 팽팽히 고착화돼 있다. 결국 나머지 유권자인 2030세대의 선택이 우리 정치의 앞날을 좌우할 것이다. 이들이 현명한 민주 선거 혁명을 하면 그간의 잘못된 국정으로 휘청거리던 대한민국을 바로잡을 수 있다.

잘못된 국정 운영에 분노하고 투표하는 것은 2030세대의 권리이자 의무다. 먼 훗날 2030세대가 노년이 돼 ‘한때 잘 살았던 우리나라’라는 서글픈 흘러간 태평가를 부르게 해선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