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6·25 마지막 미군 포로
6·25 발발 5개월 만인 1950년 11월 4일. 미군 중위 윌리엄 펀체스는 평안남도 청천강 부근에서 중공군과 맞닥뜨렸다. 적의 숫자는 압도적이었다. 이날 전투에서 수많은 동료를 잃은 그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포로수용소 생활은 지옥보다 더했다. 영하 30도의 강추위를 담요 한 장 없이 버텼다. 부상병들의 상처가 썩어가는 악취 속에서 얼어 죽지 않으려면 동료의 체온에 의지해야 했다. 하루 두 번의 멀건 죽으로 연명해야 하는 굶주림도 견디기 어려웠다.

기아와 혹한, 이질과 폐렴으로 하루에 수십 명씩 죽어갔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갖은 고문과 학대, 모욕에 시달렸다. ‘반동’으로 몰리면 지하감옥에 감금됐다. 그는 양말 속에 감춰 들여온 포켓성경의 시편 23편을 몰래 읽으며 극한의 고통을 견뎠다.

그와 함께 포로가 된 군종 신부 에밀 카폰은 ‘생지옥 속의 성인(聖人)’이었다. 그는 굶주림과 질병에 신음하는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음식과 약을 훔쳐 와 나눠줬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병들의 옷을 대신 빨아줬다. 그러다 이질과 폐렴에 걸려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펀체스 중위는 휴전협정 2개월 후인 1953년 9월 6일 ‘마지막 포로’로 귀환했다. 1038일 만의 자유였다. 그는 퍼플 하트 훈장을 받았고, 2018년 민간인 최고 등급의 팔메토 훈장까지 받았다. 카폰 신부에게 수여된 미군 최고 등급의 ‘명예 훈장’ 수훈식 때도 그가 참석했다.

미군 포로 중 생환자는 4439명이었다. 생사를 모르는 실종자도 3737명이나 됐다.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은 작년에만 유해 발굴에 1억4630만달러(약 1635억원)를 투입했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80~90대로 거동이 불편한 참전 노병들의 약값 지원마저 차질을 빚고 있다. 다국적연합분석팀이 북한 소행이라고 확인한 천안함 관련 유언비어가 아직도 횡행하고 있다. 천안함 생존자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면 버림받는다”고 절규할 정도다.

미국이 최강국이 된 데에는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군인들을 영웅으로 예우하는 애국정신이 깔려 있다. 어제 타계한 펀체스 중위를 생각하며 “조국은 당신들이 돌아올 때까지 결코 잊지 않겠다”는 미 국방부 표어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한국전쟁참전기념탑의 문구를 다시금 되새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