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림사 벽에 쓰다(題西林壁)

가로로 보면 고갯마루 옆에서 보면 봉우리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각기 다르구나
여산의 참모습 알 수 없는 것은
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라네.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소동파(蘇東坡⸱1037~1101) : 중국 북송 때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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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가 이 시를 쓰게 된 사연이 좀 특이합니다. 1079년 호주(湖州) 지사로 부임한 그는 풍요로운 고장을 다스리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황제에게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반대파가 글의 내용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그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뜻하지 않은 필화에 휘말린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 끝에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황주(黃州)로 유배됐다가 곧 여주(汝州)로 쫓겨가게 됐습니다.

그는 여주로 가는 길에 열흘 동안 여산(廬山)을 돌아보며 여러 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중 한 편이 ‘서림사 벽에 쓰다(題西林壁)’입니다. 서림사(西林寺)는 양쯔강 중류의 여산 북서쪽에 있는 고찰이지요.

이 시에서 그는 열흘이나 여산을 돌아봤지만 본모습을 다 알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가로로 볼 때와 세로로 볼 때의 모습이 다르고,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가 다르며, 낮은 곳에서와 높은 곳에서 볼 때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지요. 어느 쪽에서든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제한된 면만 볼 수 있으니 어찌 대상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산진면목’이라는 고사성어의 원전

저는 ‘여산의 참모습 알 수 없는 것은/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14자의 짧은 절구로 우주와 삶의 이치를 이토록 간명하게 설파하다니! 반대 파벌에 의해 고초를 당하고 귀양지를 옮겨 다니는 기구한 운명이 이 두 줄에 응축돼 있습니다.

이 시에서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근본이 너무도 깊고 유원해 참모습을 다 알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지요.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려면 고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라’고 할 때의 그 진면목입니다. ‘숲 안에서는 숲을 제대로 볼 수 없고 그 속에서 걸어 나와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말과 서로 통하지요.

1000년 전에 쓴 시이지만 요즘 인용해도 신선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 소리를 여러 번 들먹이는 것보다 이 시를 활용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죠. 직장에서도 그렇고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99%를 좌우하는 1%의 차이 ‘디테일’

이 시 덕분에 귀한 인연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중 ‘디테일 경영’의 대가인 왕중추(汪中求) 중국 칭화대 명예교수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몇 년 전 서울에서였습니다. 당시 그의 책 『디테일의 힘』 판매 부수는 국내외에서 1000만 부를 넘었습니다. 강연하러 한국에 온 그와 인터뷰 후 저녁을 함께 먹는 자리였죠. 그는 말수가 적고 술도 즐기지 않았습니다. 고만고만한 대화가 밍밍하게 이어졌지요.

그러다 아주 작은 대목에서 그가 반색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무슨 말끝에 ‘여산의 참모습 알 수 없는 것은/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라네’라는 소동파 시 구절을 인용했더니 자기 고향이 바로 여산이라는 겁니다. 한번 말이 트이니 일사천리였죠. 동갑내기인 우린 그날 밤 친구가 됐습니다.

이듬해에는 중국에서 만났습니다. 상하이교통대(上海交通大)에서 릴레이 강연을 마치고 식당에 갔을 때, 앉자마자 그가 ‘원샷’을 권했습니다. 빈속이라 손사래를 쳤더니 “첫 잔은 우리 인연이 잘 풀리도록, 마지막 잔은 아주 만족스러웠다는 뜻으로!”라며 먼저 잔을 죽 들이켜더군요.

그날 마지막 잔까지 좍 비운 그가 “사실은 내가 담낭을 절제해서 술을 한잔도 못 마신다. 오늘 우리 특별한 만남을 위해서 그동안 조금씩 몸을 만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가 온몸으로 보여준 디테일의 배려에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이런 게 ‘1000만 부 저자’의 힘인가 싶었지요. 그는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섬세해야 큰일도 대담하게 이룰 수 있다”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가 경영난에 빠진 한 회사를 맡아 1년여 만에 연매출을 23%나 늘린 비결도 ‘큰 것보다 작고 섬세한 요소들을 먼저 챙긴 덕분’이었지요.

쌀가게 점원에서 최고 갑부가 된 비결

작은 것이 큰 것을 좌우하는 사례를 우리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어떤 사람은 입사시험 성적이 뛰어난데도 구겨진 이력서 때문에 낙방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이력서 하나도 잘못 관리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순 없다는 게 낙방 이유였지요.

쌀집 점원에서 대만 제일의 갑부로 성공한 사람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남의 쌀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자란 왕융칭(王永慶)은 16세 때 자기 가게를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30여 개의 쌀가게가 있어서 살아남기가 버거웠습니다. 고전하던 그는 쌀의 품질과 서비스를 높이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추수한 벼를 길에서 말렸기 때문에 잔돌이 섞여 밥할 때마다 쌀을 일어 돌을 골라야 했죠. 그는 동생들을 동원해 돌을 꼼꼼히 골라낸 뒤에 팔았습니다. 이 차별화 전략은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곧이어 배달 서비스를 시작한 그는 집집마다 쌀독 크기와 식구 수를 파악해 뒀다가 쌀이 떨어질 때쯤 미리 가져다줬습니다. 또 쌀독에 남은 쌀을 다 퍼낸 뒤 새 쌀을 붓고 그 위에 남은 쌀을 부어 줬습니다. 묵은쌀의 변질을 막기 위한 것이었죠. 이처럼 작고 섬세한 배려 덕분에 그는 당대 최고의 쌀장수가 됐습니다.

왕중추 교수는 『디테일의 힘』에서 이런 사례와 함께 ‘100-1=0, 100+1=200 공식’을 일러줍니다. 1%의 부족으로 ‘0’이 될 수도 있고, 1%의 정성으로 ‘200’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죠. 쌀장수 왕융칭은 ‘100+1=200’의 경우입니다.

반면 ‘100-1=0’의 예도 많습니다. 중국의 한 냉동새우 판매 회사는 유럽에 1000t을 수출했다가 항생물질 0.2g이 발견돼 손해배상까지 했습니다. 50억분의 1 때문에 치명타를 맞은 겁니다. 왕 교수는 “사랑받는 사람이나 상품은 다른 사람이나 경쟁상품이 갖지 못한 1%의 차이를 갖고 있는데 이 1%의 차이가 곧 디테일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물고기를 요리하듯 해야 한다”는 노자의 말처럼 디테일을 중시하고 디테일에서 이기는 기업만이 생존과 성장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먼 산보다 신발 속의 모래 한 알이…

말단 영업사원 출신으로 기업 대표이사가 되고 경영학자로도 이름을 떨친 그는 ‘중국인들의 대충주의를 바꿔놓은 디테일의 거장’으로 꼽힙니다. 그의 얘기는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우리가 소홀히 해왔던 디테일의 위력을 체감케 하고, 디테일에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지요.

“처음 98%는 잘하는데 마지막 2%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톰 피터스) “0.01초의 차이가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고 한 사람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만든다”(이건희) 등의 명언도 이와 같습니다.

첨단 경쟁 시대에는 사소한 것이 더 큰 차이를 낳지요. 상품에서도 ‘1%의 편리함’이 승패를 가릅니다. 살림살이가 어렵고 나라 경제가 출렁거린다고 난리를 칠수록 ‘1%의 차이’는 더 중요해지지요.

그래서 옛사람들도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먼 곳에 있는 산이 아니라 신발 안에 있는 작은 모래 한 알”이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