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시가총액이 일류 자본시장 담보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 성장과 더불어 세계 10위권으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선진 시장이라고 하기엔 질적, 양적으로 미진한 점이 많다. 돌이켜보면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가 열리자마자 연이어 불어 닥친 국채 파동, 대한증권거래소 주식 파동, 1962년 5월 증권 파동, 증권금융주 파동 등으로 얼룩졌고 투자자들은 주가 폭락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1968년 세계에 유례없는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지만 거래 기반이 정비되지 못한 증권시장으로서는 계속 책동전(세력끼리 주가 대결하는 양상)에 시달려야 했고 투자자의 불신은 높아만 갔다.

1971년 6월 3일, 정부는 증권시장 개설 이래 책동전에 따른 투기판이었던 증권거래제도를 혁신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일제시대 잔재인 청산거래제도를 없애면서 선진적인 시장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증권거래소는 업무규정과 수탁계약준칙을 일부 개정해 ①주식의 공매매 등으로 증권 투기를 유발했던 종래의 보통거래를 반드시 실물로 결제하도록 했다. 거래자의 자력이나 대차거래 또는 신용거래에 의해 실물과 현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거래할 수 없게 했다.

②차금 결제만 하면 무기한으로 결제를 이연할 수 있던 것을 금지하고 매매 체결 후 5일 이내에 수도 결제하게 했다.

③대차거래에서 인정하던 가융자·가대주·가결제를 폐지하고 반대 매매 및 차금 결제를 폐지하도록 조치했다. 이로써 증권거래소 설립 이후 만연했던 책동전을 방지할 수 있게 됐다.

④청산거래 대신에 고객과 일정 증권회사 간 60일간의 신용거래를 허용했다. 신용거래할 수 있는 회사의 자격 요건을 자본금 1억원 이상으로 하고, 이와 함께 증권금융회사로부터 융자나 대주를 가능하게 했다. 앞으로 설립할 단자시장에 참여해 증권금융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증권회사의 자본 대형화를 유도했다.

⑤일원화돼 있는 시장을 상장 조건에 따라 1부 우량주식과 2부 비우량 주식으로 나눠 이원화했다.

⑥경쟁매매에 의해 결정한 단일가격 거래(격탁거래)에서 경쟁매매에 의한 복수가격으로 매매할 수 있게 하고, 계속 매매가 가능한 포스트거래제도를 도입했다. 이로써 많은 수의 상장기업을 거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같은 내용의 6·3조치에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증금주 매수 측에서는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법원에서 가처분 결정을 내리자 정부는 증권거래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개정해 1971년 12월 1일부터 새로운 증권거래제도를 시행했다. 이런 증권거래제도의 개선은 유통시장을 안정시켰고, 1972년 기업공개촉진법에 따라 공모주 열풍이 일어나고 상장기업 증가에 따라 주식 공급이 늘어나면서 증권시장이 활성화됐다.

당시 투기판으로 불리던 증권시장 육성의 기본 목표는 내자조달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외채망국론이 나올 정도의 막대한 외채는 그나마 높은 금리로 조달할 수 있었지만 내자조달은 한계에 부딪혔다. 당시의 높은 물가상승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은행금리로는 낮은 저축률을 극복할 수 없었다. 교과서 이론이라는 직접금융을 현실화한 정부 정책은 기업의 자금 수요를 충족하고 투자자의 투자 성과를 만족시켜 유수의 세계적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증권시장은 많은 사건 사고로 이해관계자에게 영욕의 장이 됐다. 시가총액으로 세계 10위권의 자본시장이 됐다고 해서 일류 시장이 된 것은 아니다. 금융 환경 면에서 우리 시장은 세계 시장의 파고에 그대로 흔들리는 상태다. 내일을 모르는 파생금융상품과 암호화폐, 디지털화하는 금융환경 변화를 두렵게 바라보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 계획을 짜고, 벽돌을 쌓듯이 체계적으로 구상을 이뤄내던 정책가들은 어디로 갔는가. 사고가 터지면 수습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해 다른 사고로 연결되는 이런 불안한 시장을 국민은 한숨 속에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