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새 리더십 등장
산업·민주화 다음은 '선진화'인데
국가 방향타 쥔 정치는 3류화

이대로면 선진국 문턱서 추락
'관념과 허상'서 '실질과 능률'로
갈등과 퇴행의 정치 이젠 끝내야

오형규 논설실장
[오형규 칼럼] 2022년,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21세기도 벌써 20년 넘게 흘렀지만 진정한 21세기 출발은 2022년이 아닐까 싶다. 한 세기 전 1차 대전과 스페인독감이 종식되고 나서야 비로소 20세기가 열렸듯이 말이다. 코로나와의 전쟁을 끝내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은 향후 5년을 이끌 새 리더십을 맞는다.

하지만 2022년을 새 전환점으로 마냥 반길 수 있을까. ‘국가 방향타’를 쥔 정치의 3류화가 굳어져 국민의 ‘미래 고민’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정치화’하면서 앞서가는 각 분야를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정치 본령을 그저 패거리 짓고 세(勢) 대결 벌이는 걸로 아는 집단착각이다. 그러니 선거에 목을 매고, 표라면 영혼이라도 판다.

중심을 잡아줄 원로도 없다. 지식인, 미디어, 사회단체나 심지어 소모임 단톡방조차 진영 프레임에 지배된다. 진영 사이에 공약수가 있기나 한가. 축구 대표팀 경기 말고 ‘국민 통합’은 잊은 지 오래다.

이건희 회장이 ‘정치는 4류’라고 한 지 26년이 흘렀건만 변한 게 없다. 외려 공인(公人)의 책임감도, 사인(私人)의 부끄러움도 상실한 ‘정치 건달들’이 더욱 판친다. 그들이 조선 예송논쟁 하듯 아무말 대잔치와 말꼬리 잡기로 허송한 세월이 얼마인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는 자부심이 이젠 나아갈 방향을 상실한 폐색감으로 변하고 있다.

뜻 있는 이들은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 화두는 ‘선진화’라고 입을 모은다. ‘산업화=선진 경제강국’이 아니었듯이, ‘민주화=선진 민주사회’를 만들어낸 게 아닌 탓이다. 산업화를 이뤘어도 글로벌 백신·반도체 전쟁을 보면 아직 멀었다. 민주화 성과라는 것도 다수의 횡포, 권력 집중과 오남용에선 독재정권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정치가 모든 것을 틀어쥐고 뒤흔드는 구조는 되레 강화되고 있다.

이대로면 선진국 문턱에서 추락하는 건 불보듯 뻔하다. 그러면 2022년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 시대정신(Zeitgeist)이란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신자세나 태도로 정의된다. 혹자는 공정과 정의를, 혹자는 격차 해소를 꼽는다. 하지만 근본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도 많다. 전직 A장관은 ‘신뢰와 원칙’을 들었다. 디지털 대전환기에 최고 가치이고, 이에 최적화된 스펙을 갖춘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맡겨야 한다는 점에서다. 지난 4·7 재·보선의 2030세대 표심이 일깨워줬다고 한다. B교수는 ‘잃어버린 10년, 정신차려 되찾자’가 돼야 한다는 말을 대학생들에게서 많이 듣는다고 한다. 세계가 모두 자국이익을 위해 뛰는데 한국만 과거지향의 감성적 민족주의로 회귀한 데 대한 반발이다.

최근 《대한민국 읽기》를 낸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는 시대정신을 ‘건너가기’로 요약했다. 과거에 갇힌 퇴행을 넘어서야 할 텐데, 어느 진영도 ‘미래를 말하는 능력이 없다’는 게 이유다. 지지도 1, 2위 대선 주자가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건너가기’를 해왔고, ‘건너가기’를 잘 아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선택지’ 중에 그럴 만한 인물이 있는지 모르겠다.

흔히 보수는 유능하고, 진보는 도덕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목도한 것은 보수와 진보 모두 도덕적이지도, 유능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희망의 새 시대’(전 정부)도, ‘내 삶을 책임지는 나라’(현 정부)도 허울좋은 수사였을 뿐이다. 선진사회의 필수덕목인 법치, 공정, 정의, 의무, 책임, 인권 같은 가치들이 그간 얼마나 많이 훼손됐는가.

지금 절실한 건 ‘누가(who)’가 아니라 ‘어떻게(how)’다. 이제는 물어봐야 한다. 저성장, 저출산·고령화, 일자리, 고비용·저효율 구조에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또한 미·중 간 ‘그레이트 게임’에 어떤 전략을 가졌는지, 어떻게 이런 고차원 복합방정식을 풀지, 어떻게 퇴행과 갈등의 늪을 건너갈지 따져물어야 한다.

모두가 정치를 욕한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관념과 허상’ ‘실질과 능률’을 구분 못하면 ‘잃어버린 10년’이 20년, 30년이 될지도 모른다. 정치인은 반품도 안 된다. 충동구매하고 나면 4~5년간 싫어도 계속 써야 한다. 2022년의 시대정신을 고민하지 않고선 깨어있는 시민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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