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롤 모델 찾기
30여 년 전, 어렵게 시험을 통과하고 변리사가 되고 보니 우리나라 세 번째 여성 변리사라고 했다. 당시 우리나라 개업변리사가 100명이 채 안 되는 시절이었고 여성의 전문직 진출이 미약했으니 화제가 됐다. 다수의 언론과 방송에서 인터뷰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오래전 이야기다. 그 후 유학을 다녀오고 개업하면서 업계의 여러 후배를 만났다. 나의 인터뷰에 자극을 받아 시험공부를 시작했다거나, 여고 때부터 변리사를 꿈꿨다거나, 유학으로 전문성을 높여 개업의 용기를 내었다는 후배도 있었다. 대학 때 나의 전공인 불어불문과 출신들이 변리사에 도전해 많이 합격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위인전을 읽으며 존경하고 닮고 싶은 인물을 가슴에 새기고 학업에 매진했다면, 요즘은 좀 더 가깝고도 현실감 있는, 주변에서나 언론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사람을 모델로 삼고 이들을 따르거나 벤치마킹하고자 하는 듯하다. 역할 모델로 모범이 되는 인물을 롤 모델(role model)이라고 하니, 필자의 예전 인터뷰 기사를 보고 시험공부를 시작하고 외국 유학을 꿈꿨던 후배들에게는 필자가 가장 현실적이고 가까이 있던 롤 모델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발명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여성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흔히 여성들의 약점이라고 하는 네트워킹이나 정보 부족의 문제점은 여성의 강점인 감성과 친화력, 사람에 대한 배려와 섬세함으로 보완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아이디어로 발명을 이루고 이를 비즈니스에 제대로 적용하자면 먼저 이 길을 걸어갔던 현실적인 롤 모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롤 모델이라고 해서 완전체는 아닐 것이고 부족한 부분도 반면교사가 되는 것이니 찾아낸 롤 모델의 장단점, 성공과 실패의 요인을 꼼꼼하게 파악해서 닮고자 노력하고 보완과 개선에 힘을 쏟는다면 이것이 가장 현명한 성장의 지름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의미 있고 선각자의 보람이 크겠지만 이른바 가성비는 높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자기방식만을 고집하며 더디게 갈 까닭은 없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역사책을 읽는 이유도 사실은 훌륭한 인물을 찾아 벤치마킹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학문의 세계에서나 기술 세계에서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에 후학들이 벽돌 하나를 더 올리며 세태와 환경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가까이 있으면서 나와 형편이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헤쳐나간 현실적인 존재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내가 추구하는 기술 분야의 혁신 또한 기존의 발명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기술을 덧입혀 또 다른 진전과 업적을 이루고 일가를 세울 수도 있으므로 내 주위에서 바로 그런 ‘롤 모델’을 찾아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