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벼루
구양수

흙벽돌이나 기와가 하찮은 물건이지만
붓과 먹 함께 문구로도 쓰였다네.
물건에는 제각기 그 쓰임이 있나니
밉고 곱고를 따지지 않는다네.
금이 어찌 보물이 아니고
옥이 어찌 단단하지 않으랴만
먹을 가는 데에는 기와 조각만 못하다네.
그러니 비록 천한 물건이라도
꼭 필요할 땐 그 값을 견주기 어려운 줄 알겠네.
어찌 기와 조각만 그렇겠는가.
사람 쓰는 일 옛날부터 어려웠더라네.


구양수(歐陽脩, 1007~1072) : 송나라 문인 겸 정치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문구 살 돈이 없어 어머니가 모래 위에 써 준 갈대 글씨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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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황제 휘종은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습니다. 그중에서도 그림 보는 눈이 유난히 밝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화가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독특한 그림 문제를 냈습니다.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추었다’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되 특히 ‘감춰진 절’을 제대로 표현하라.”

많은 화가들이 골머리를 앓다가 희미하거나 작은 절을 그려 놓는 식으로 묘사했지요. 그런데 유독 한 작품에만 절이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절 대신에 깊은 산 속 계곡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스님 모습만 있었죠.

이 그림을 본 휘종은 그에게 1등상을 주었습니다. 다른 화가들은 절과 탑을 어떻게든 화폭에 담으려고 했지만, 그는 그냥 물을 길어 가는 스님 모습만으로 근처에 절이 있다는 것을 암시했지요.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은 뜻이나 가치를 제대로 찾을 줄 아는 게 곧 ‘안목(眼目)’입니다. 한 단어에 ‘눈 목(目)’ 자가 두 개나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겉으로 보는 눈이고 하나는 속을 비추는 거울이죠. ‘본질을 꿰뚫어보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습니다.

15세기 최고 과학자로 꼽히는 장영실이 그저 부산 동래현의 관노로 일생을 마쳤다면 어찌 됐을까요. 눈 밝은 임금 세종은 장영실의 비상한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종6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했습니다. 신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지요.

세종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장영실은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최첨단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를 발명할 수 있었습니다. 측우기와 해시계 등 세계를 놀라게 한 성과를 이루어낸 것도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세종의 혜안 덕분이었지요.

세종은 작은 재능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그 사람의 장점을 발굴하고, 한편으로는 혹독하게 훈련시킬 줄 알았던 강유(强柔) 겸비의 리더였습니다.

또 한 사람. ‘가장 비싼 값으로 인재를 사는 것’과 ‘가장 깊은 마음으로 인재를 감동시키는 것’의 두 바퀴 수레 이론을 터득한 중국 거상 호설암(胡雪巖)의 경륜도 대단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능력 있는 사람을 찾으면서 돈을 아껴서는 안 된다. 나의 비결은 돈으로 인재를 사는 것이다. 사물을 대하는 눈이 날카롭고 사람됨이 믿을 만하면 돈은 아무리 많이 줘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정말로 걸출한 인재를 얻으려면 돈을 많이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情)과 의(義)로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진정한 인재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나는 세상과 사람의 본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하고 스스로 돌아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구양수 시 ‘낡은 벼루’에서 새로운 힘을 얻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옥이 어찌 단단하지 않으랴만/먹을 가는 데에는/기와 조각만 못하다’는 구절과 ‘꼭 필요할 땐 그 값을 견주기 어려운 줄 알겠네./어찌 기와 조각만 그렇겠는가’라는 구절을 앞뒤로 바꿔가면서 몇 번씩 음미합니다.

아, 낡은 벼루조차 먹을 가는 도구로써 가치가 충분하다는데 나는 세상에 어떤 도구로 쓰임을 받을까….

그러면서 사물과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 저에게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기와 조각’처럼 세상의 먹을 위한 벼루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겸손해지기도 합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