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수즈먼 《일:석기시대부터 로봇시대까지 역사》

"농경사회 이후 나태는 늘 죄악이었지만
이젠 노동의 의미를 원점서 되돌아봐야"
[CEO의 서재] 누구나 '유한계급'이 되기를 욕망한다

일을 줄이려고 컴퓨터를 도입했는데 컴퓨터에 붙어 앉아 처리할 일은 산더미처럼 늘어나기만 했다. 단순히 야근과 일 중독을 넘어 과로사하는 사람들까지 속속 등장했다. 누구든 물려받은 재산이 없거나 횡재 기회가 없는 한 죽도록 일해서 자녀를 키우고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국가가 노동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주겠다고 나섰다. 한편에서는 인공지능이 적용된 기계들이 느닷없이 우리에게 이제 ‘일 그만하고 쉬라’고 명령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기본소득 논의까지 등장했다.

영국 인류학자 제임스 수즈먼은 신작 《일: 석기시대부터 로봇시대까지 역사》에서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간은 과연 얼마나 일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역사와 사회인류학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봤다.

현대 과학기술과 기업문화 태동기인 1880년대 서구의 주당 노동시간은 60시간이었다. 1930년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기술 발전으로 100년 뒤에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재화 공급이 충분해지고 주당 노동시간도 15시간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2021년에 이른 지금 대부분 급여생활자의 주당 노동시간은 40시간 안팎이다. 케인스는 100년 뒤 생활 수준이 4~8배 높아질 것이라고도 했는데,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4배는 이미 1980년에 달성됐고 2030년께는 무려 17배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정말 미친 듯 일해서 이만큼 잘살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인류의 원초적 노동관을 고대 수렵채집 경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핀다. 1970년대 서구 문명이 전파되기 전까지 이 전통이 유지됐던 아프리카의 부시맨 종족에게는 노동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랬던 인류가 수렵채집 단계를 벗어나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사시사철 ‘근면’하고 ‘인내’해야만 수확과 생존이 가능하다는 가치관이 생겼다. 농작물을 교역하는 공간으로 도시가 등장했고 도시민의 일, 즉 정치인 관료 상인 서기의 일은 농민의 일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 본질은 서구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중세, 르네상스기를 거쳐 근대 산업화 시기에 이르기까지 일관했다. 20세기에 이르러 테일러리즘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식노동이 확대되면서 더욱 강화됐다. 나태는 늘 죄악이었고, 정시 출퇴근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일탈자였다.

하지만 당초 원시 수렵채집에 맞게 살아온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은 사라지기 힘들다. 누구든 베블렌의 표현대로 ‘유한계급’에 진입하기를 저 깊은 곳에서 욕망한다. 노동하지 않고 삶을 누리는 계층을 역사는 귀족이라고 불렀다. 농사와 목축은 언제나 농노나 평민의 일이었고, 사냥은 그냥 취미였다. 현대판 귀족인 최상층 금수저들은 노동하지 않는다. 사치품으로 치장한 채 많은 시간을 파티, 레저, 여행, 취미로 보내며 그런 사람들끼리만 교류한다.

귀족 대 평민이든 자본가 대 노동자든, 노동의 고역을 벗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갈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도시 학교로 보내면서 이렇게 당부한 기록이 있다. “글공부를 열심히 하거라. 그래야만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신세를 면한다. 서기가 되면 일 안 하고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인류사에 산업혁명과 공장노동이 처음 등장한 이래 전 세계가 숨 쉴 틈 없이 달려온 지 어언 200년이다. 누구든 자신이 사로잡혀 있는 좌우 이념의 프레임을 떠나 백지 상태에서 되돌아보자. 케인스의 말마따나, 우리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말고 ‘유용한(useful)’ 것보다 ‘바람직한(good)’ 것을 항상 우위에 놓아야 한다. 일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하는 것이지, 일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18세기 애덤 스미스는 재화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해 분업과 교역 확대를 강조했다. 그 사상에 바탕을 두고 20세기 경영자와 노동자 모두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려 분투했다. 그 결과 재화의 희소성 문제는 대개 해결됐다. 그렇다면 지금쯤, 적어도 노동의 목적과 의미를 원점에서 되돌아보는, 전혀 새로운 경제학 내지 경영학이 등장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송경모 <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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