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시장 키워드 된 '생존'과 '속도전'

한국 전자상거래 비중 36%…美·中 제치고 압도적 1위
"뭐라도 해야 살아남는다" 위기감에 적과의 동침도 불사
"온라인 3곳, 오프라인 4~5곳으로 업계 재편 가능성"

박수진 논설위원
[뉴스의 맥] 유통판 바꾼 쿠팡發 '1030 전쟁'…"10년내 3곳만 생존"

국내 유통시장이 유례없는 지각 변동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 제휴와 인수합병(M&A)이 이어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대규모 투자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

국내 1위 온라인 쇼핑업체 네이버가 콘텐츠와 유통분야에서 경쟁자인 CJ그룹, 신세계그룹과 각각 지분을 맞교환하며 ‘피’를 섞었고, 쿠팡은 지난달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하며 5조원의 ‘실탄’을 확보했다. 롯데그룹은 최근 중고제품 온라인 플랫폼 ‘중고나라’를 인수한 데 이어 5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이베이코리아 매각을 위한 예비입찰에도 뛰어들었다. GS그룹 내 유통 계열사인 GS리테일과 GS홈쇼핑은 오는 7월 통합을 앞두고 막판 마무리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런 숨 가쁜 변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생존’과 ‘속도전’이다. 코로나19 사태와 전자상거래의 급속한 확대로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하며 불확실성이 커지자 유통업계 전체가 “생존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몰리고 있다. 그런 공포가 배송시장에서 폭발한 게 ‘빠른 배송’ 경쟁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온라인 쇼핑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상품의 질과 가격보다는 ‘빠른 배송’이 유통의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물류·배송 경쟁의 결과로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 내 유통시장이 7~8개 업체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쿠팡이 불 지른 속도전
국내 온라인시장의 급속한 확산과 빠른 배송 전쟁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우선 한국의 온라인시장 성장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미국 전자상거래 시장은 아마존이 1994년 출범한 뒤 26년간 전체 소매시장 비중이 20.3%(작년 말 기준)로 커졌다. 한국은 훨씬 빠르다. 2010년 ‘한국의 아마존’을 모토로 출범한 쿠팡이 등장한 지 10년 만에 그 비중이 35.8%로 확대됐다. 전자상거래 종주국 미국의 두 배 가까운 수준이고, 비중 면에선 압도적 세계 1위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중국과 온라인 거래 비중이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코로나를 거치면서 중국과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고 말했다.

유통업계는 이런 시장 재편기에 살아남기 위해 ‘1030(10㎞ 이내에서 30분 내 배송)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휴든, 신규 투자든, 인수든 어떤 방식을 쓰든지 전국을 배송기지로부터 10㎞ 이내로 두고 30분 내에 배송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경쟁이다.

이 경쟁에서 가장 앞서가는 것은 쿠팡이다. 쿠팡이 지난달 NYSE 상장 때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쿠팡은 10년간 총 30여 개 도시에 150여 개 풀필먼트센터와 배송센터를 구축했다. 면적이 미식축구장 400여 개 규모로 230만㎡(약 70만 평)에 달한다. 전국 70%가 쿠팡 물류센터로부터 11㎞ 반경 안에 있어 30분 내 배달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쿠팡이 이 같은 물류·배송 시스템에 10년간 쏟아부은 자금은 4조원이 넘는다. 같은 기간 롯데 신세계 등 국내 유통기업이 투자한 총액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게 업계 추산이다.

쿠팡의 물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장 조달자금 중 1조원을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7개 도시 물류센터에 추가 투자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국내 처음으로 전국을 자사 물류기지로부터 10㎞ 반경에 두고 30분 내 배달이 가능해진다. 또 자사 제품 배송뿐 아니라 다른 온라인 업체들의 물품을 입고부터 배송까지 통합관리해주는 ‘제3자 물류’(풀필먼트)사업을 본격적으로 확대할 수 있게 된다.
[뉴스의 맥] 유통판 바꾼 쿠팡發 '1030 전쟁'…"10년내 3곳만 생존"

“한국의 빠른 배송 실험…세계적 관심거리”
쿠팡의 진격은 국내 유통업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네이버는 온라인쇼핑 시장에서 17%(쿠팡 13%)의 시장 점유율로 △거래액(네이버 22조6000억원 vs 쿠팡 20조원) △사용자(2000만 명 vs 1485만 명) △판매자(41만 명 vs 20만 명) 등에서 쿠팡을 압도한다. 그러나 자체 물류망이 없다는 게 가장 큰 핸디캡이다. 네이버는 물류 1위 업체 CJ대한통운, 대형마트 1위인 이마트와 손잡고 물류 및 배송 능력을 배가한다는 전략이다.

전국 112개 롯데마트 매장과 477개 롯데슈퍼 매장을 배송기지로 활용 가능한 롯데는 물류 시스템보다는 부족한 온라인 플랫폼을 강화하기 위해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에 참여했다. 이외에 11번가는 우체국과 손잡았고, 이마트와 SSG닷컴은 매장을 물류센터로 리뉴얼하거나 온라인 배송전용 물류센터를 새로 짓고 있다.

국가물류통합정보센터에 따르면 기업들의 이 같은 공격적(?) 투자로 물류창고업으로 등록된 국내 물류시설 수는 2018년 260곳에서 지난해 736곳으로 세 배 가까운 수준으로 증가했다.

네이버 등 주요 업체는 이제 막 ‘1030 시스템’ 구축에 나서고 있지만 편의점업계는 일찍부터 쿠팡과 30분 배송을 놓고 맞짱을 뜨고 있다. GS25, CU 등은 전국에 5만 개 넘게 깔아놓은 매장을 기반으로 도보, 오토바이 등을 이용한 30분 배달망 완성을 서두르고 있다. 배달전문업체 배달의민족과 요기요도 지난해부터 주요 도시 역세권에 배달전문매장(B마트, 요마트)을 구축해 속도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오린아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 전자상거래 시장은 확장 속도뿐 아니라 유례없는 배송 속도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 세계가 그 결과를 주목하고 있는 실험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온·오프 공존 시대, “더현대서울 성공 주목할 만”
전문가들은 물류·배송 속도전이 상당 기간 진행되면서 유통시장에 적잖은 지각변동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서 교수는 “국내 전자상거래 시장은 이제 막 확장기로 들어섰고 앞으로 10년 내 그 비중이 50%로까지 확대될 것”이라며 “그때쯤이면 온라인 시장에서는 3개 정도, 오프라인 시장에선 4~5개 업체가 살아남아 과점 체제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배송 경쟁이 각 유통업체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정연승 한국유통학회장(단국대 경영학과 교수)은 “유통시장 한쪽에선 가격과 배송 속도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겠지만 이런 트렌드는 오히려 각자의 정체성을 찾도록 독려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프라인 업체들이 모두 온라인사업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신선식품과 명품, 패션 등으로 전문화하거나 매장을 유료 체험 서비스 장으로 바꾸는 등의 고유 영역을 찾아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현대백화점그룹이 지난 2월 말 서울 여의도에 문을 연 ‘더현대서울’이 개점 한 달 만에 1000억원이라는 기록적인 매출을 올린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14년 만에 다시 최저가 전쟁
이마트 "최저가 보상제"…마켓컬리·네이버도 가세
유통업계가 온라인·디지털화 속에 급속한 재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한 ‘최저가 경쟁’도 치열하다. 2007년까지 벌였던 대형마트 최저가 경쟁이 온라인에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최저가’를 외치는 데는 이 판에서 소비자를 뺏기면 매출도, 회사 존립도 위태롭다는 긴박함이 깔려 있다.

이마트는 지난 8일 ‘최저가격 보상 적립제’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신라면 CJ햇반 서울우유 등 500개 품목의 판매 가격이 쿠팡 롯데마트 홈플러스보다 비싸면 차액만큼을 포인트로 돌려주겠다는 정책이다. 이마트는 2001년에도 ‘반경 5㎞의 다른 대형마트’보다 비싸게 사면 차액을 돌려준다며 최저가 마케팅을 펼쳤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일일이 가격을 입증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2007년 유야무야 폐지됐다. 이번엔 이마트 앱에서 가격을 자동 비교할 수 있게 보완했다.

앞서 2000년대 최저가 논쟁이 대형마트 간 싸움이라면 이번엔 기존 유통업계가 쿠팡을 정조준하고 있다. 미국 뉴욕증시 상장 이후 쿠팡의 시장 장악을 위한 공세가 본격화됐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쿠팡은 지난 2일부터 멤버십 가입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로켓배송 상품을 무료배송해준다. 로켓배송 상품은 쿠팡 전체 판매량의 약 90%를 차지한다. 사실상 쿠팡이 판매하는 거의 전 제품 가격을 10% 인하해 주는 셈이다. “상장을 통해 5조원의 실탄을 확보한 쿠팡이 더 공세적으로 시장 장악에 나서고 있다”는 게 업계 해석이다.

쿠팡과 이마트의 이 같은 공세에 마켓컬리도 맞불을 놓고 나섰다. 마켓컬리는 지난 12일부터 신선식품과 쌀, 김, 라면 등 인기 제품 60여 개를 온라인몰 최저가격으로 판다. 네이버는 가격 대신 ‘빠른 정산’을 내세우고 있다. 네이버는 스마트스토어 판매자를 대상으로 배송완료 다음날 대금을 지급하는 ‘빠른 정산’ 비율을 100%로 확대했다. 그동안은 배송완료 다음날 90%, 구매 확정 다음날 10%를 지급했다. 네이버는 또 연내 멤버십 가입자들에게 무료배송 혜택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롯데와 홈플러스도 쿠팡 이마트 네이버 등의 공세에 맞서 가격 전략을 손질할 방침이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빠른 배송과 최저가는 소비자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조합이지만 유통업체엔 회복하지 못할 내상을 입힐 수 있다”며 “진행 양상에 따라 업계 재편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ps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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