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뇌가 있는 풍경] 학폭 잠재울 '얀테의 법칙'

학교폭력(학폭) 논란이 스포츠계, 연예계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학폭은 예전부터 있던 일이나 최근 공론장에서 심각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교육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전문가를 포함하는 깊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문열 작가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보듯, 학폭은 주변 학우, 선생님, 가족, 지역사회까지 모두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학폭에 대한 학술 연구는 1970년대 초반 북유럽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인간 대상의 사회심리학 연구 성격이 강했지만, 이제는 실험동물을 활용한 뇌과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사회심리학 연구는 현상을 서술하고 중요한 이슈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현상이 일어나는 기작은 실험동물을 통해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러 현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힘으로써 근본에 존재하는 기작을 규명하는 것이 과학의 중요한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동물을 이용해 인간 대상으로 할 수 없는 실험을 해야 한다.

학폭은 피해자로 하여금 사회적 고립을 느끼게 만든다. 대개 한 명의 주동자와 그를 따르는 학생들이 몇 명 있고, 나머지 대부분 학생은 침묵하는 방관자다.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고 심리적인 괴롭힘도 동원된다. 학폭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동조자가 늘어나며, 피해자는 소위 ‘왕따’ 상태에 빠져 심한 사회적 좌절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결과 피해자는 자존감을 잃고, 패배감과 우울증에 빠지고, 사회성이 심하게 위축돼 복종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자살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물론 학창 시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직장폭력이나 사이버폭력 뉴스에서 학폭과 비슷한 사례를 자주 보게 된다.
피해자 뇌까지 변화시키는 학폭
[신희섭의 뇌가 있는 풍경] 학폭 잠재울 '얀테의 법칙'

그렇다면 뇌는 어떻게 피해자를 이런 심리상태로 이르게 할까? 답은 동물실험에서 얻을 수 있다. 생쥐를 이용한 사회적 좌절 스트레스 연구에 ‘주인-침입자 실험’이 흔히 이용된다. 쥐를 공격성이 높은 다른 쥐가 이미 거주하는 케이지에 넣는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한다. 주인 쥐는 이 방문자에게 공격적 행동을 보이고, 방문 쥐는 사회적 좌절 스트레스를 겪는다. 이를 여러 날에 걸쳐 반복하면서 냄새가 통하는 투명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가까이 지내게 한다. 사회적 좌절 스트레스를 겪는 쥐는 행동, 뇌기능, 신경신호 전달, 호르몬 조절 등 건강 상태 전반에서 변화를 보인다. 무기력해지고, 사회성이 위축되고, 우울증 상태에 빠진다. 더불어 새로운 것에 대한 탐색활동이 사라지고, 쾌감에 무뎌져 암수 간 교접도 안 하고, 약물과 알코올에 쉽게 중독된다. 사회적 좌절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특히 학습·기억 능력이 심하게 떨어진다. 뇌의 해마 부위에서 학습·기억의 형성에 필요한 단백질은 물론 학습·기억을 형성하는 뇌회로 기작인 시냅스가소성도 저하된다. 사회성이 위축된 생쥐는 전전두엽 신경의 절연막이 감소해 신경신호 전달에 이상이 생긴다. 전전두엽은 사회성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위다. 사회적 좌절 스트레스를 경험한 동물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피질로 이어지는 스트레스 호르몬 축의 만성적 기능 항진에 의한 스트레스 호르몬 증가를 겪는다.
북유럽의 배려·평등·겸손 문화 절실
이 결과는 만성 사회적 좌절 스트레스가 뇌에 호르몬 및 분자생물학적 변화를 유도해 신경세포 기능을 변화시킨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로써 신경회로의 전기생리학적 상태가 바뀌게 되고, 종국에는 뇌회로 기능까지 변화시켜 여러 행동 증상을 유도하는 것이다.

언젠가 핀란드 헬싱키대에 초청 강연을 간 적이 있다. 강연 후 식사 중에 교육제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핀란드 학생들의 생활 만족도가 높다는 기사를 읽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는 모든 학생이 똑같은 목표를 놓고 경쟁해 행복지수가 매우 낮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래서 핀란드 교육제도의 어떤 특성이 학생들이 편안히 학교생활을 하도록 만드는지 물었다. 동료 교수로부터 핀란드 교육은 학생 개개인의 능력과 취향에 맞춰 각자 타고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돕는다는 답을 들었다. 이런 교육철학은 북유럽 문화 전반에 배어 있는 ‘얀테의 법칙’과 관련이 깊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지나친 야심을 품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배려, 평등, 겸손의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저절로 학폭이 생기기 어려운 문화를 형성했다. 한국의 교육, 나아가 사회 전반에도 ‘얀테의 법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신희섭 < 前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UST 명예교수 >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