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설왕설래 '러시아 백신'

러시아는 넓은 국토만큼이나 다층적 이미지다. 대문호 톨스토이와 거장 차이콥스키의 조국인가 하면, 공산혁명의 원조이자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지난한 민주주의 이행 과정에 있는 나라다. 자원부국이어서 원자재 가격 등락에 따라 성쇠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런 러시아의 또 다른 얼굴이 ‘기초과학 강국’이다.

러시아에선 과거 서방과의 냉전기에 군수산업, 특히 원자력과 항공우주산업이 발달했다. 여기에선 기초과학 기술 기반이 중요하고, 그 출발점이 화학이란 점에서 러시아는 ‘화학 강국’이기도 하다. 그런 전통은 근대 화학의 중요 발견인 원소주기율표를 1869년 발표한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유산균 요구르트의 아버지로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일리야 메치니코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국적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17명인데, 물리학상(12명) 외에 화학상 3명, 화학에 기초를 둔 생리의학상 2명을 배출했다.

이런 역사만 보면 작년 8월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승인)했다는 코로나 백신 ‘스푸트니크V’는 각국의 관심을 끌었어야 맞다. 그러나 러시아의 국가 신뢰도가 그리 높지 않은 데다 임상시험의 최종 단계인 3상 시험을 건너뛰었다는 점에서 박한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푸대접받던 스푸트니크V 백신이 ‘예방효과가 91.6%’라는 사실이 올 들어 국제 의학학술지에 발표되면서 급반전했다. 속칭 ‘물백신’에서 갑자기 ‘인류의 희망’으로 바뀌어, ‘소련 붕괴 이후 최대 성과’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최근 모스크바 시민 1000여 명이 스푸트니크V 백신 2차 접종 뒤에도 코로나에 감염됐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인도의 백신 수출금지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러시아 백신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달 말 예정이던 아스트라제네카 반입이 이달 셋째주로 미뤄지고, 물량도 40% 줄어든 탓이다. 여전히 정부는 러시아 백신에 대해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한국과 러시아 간에는 좋은 협력 기억도 있다. 1995년 삼성전자의 김치냉장고(러시아의 탱크 냉방에 쓰인 열전소재), 2008년 통화 잡음을 크게 줄인 휴대폰(러시아군 통신기술) 등은 러시아 기술이 활용된 결과물이다. 러시아 로켓을 이용한 한국 인공위성 발사도 2000년대 들어 수차례 성공했다. 러시아 백신이 그런 기억을 이어갈 수 있을지 관심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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