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복지국가의 명암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이슈 가운데 하나가 복지 문제다. 선거철을 맞아 원칙과 형평성이 심히 부족한 돈 뿌리기가 난무하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이라는 변명이 따라붙지만 복지와 포퓰리즘이 엉켜 재정상태가 말이 아니다. 이대로 가다간 선심성 돈 뿌리기 때문에 정작 추진해야 할 기본 복지조차 불가능해질 것 같다. 복지국가는 한때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제도’로 칭송받았지만 그런 영예는 이미 끝났고, 유럽에서 실시되는 제도는 처음과 많이 다르다. 70년간 시행착오를 한 결과다. 한데 우리 정부의 정책은 외국의 경험들을 제대로 공부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원초적 모습을 띠고 있다.

국가가 시행하는 부분적 복지는 1880년대 독일에 처음 등장했지만 전 국민에게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보장한 복지국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에서 시작됐다. 1945년 전과 후의 다른 점은 복지 혜택이 ‘시혜가 아니라 권리’가 됐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노동당 정부가 실행에 옮겼지만 보수당이 집권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만큼 당시 시대정신에 부합했다. 복지국가의 목표는 첫째, 완전 고용, 즉 케인스 경제학에 힘입어 정부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인데 1930년대 대공황기에 대량 실업을 경험한 국민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둘째, 무상 중등교육, 국민의료보험, 공공 임대주택 등 공공서비스의 도입이다. 셋째, 기간산업의 국유화인데, 이것은 단순히 사회안전망의 확충을 넘어 자본주의를 손보겠다는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이념적 지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성공은 매우 짧았다. 특히 1970년대에 이스라엘·아랍 전쟁으로 세계 경제의 위기가 오자 빠르게 인기를 잃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선 대규모 예산이다. 천문학적 예산 확보를 위해 부과한 누진적 세금은 일하고 저축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100만원을 벌어 80만원을 세금으로 빼앗기는 상황에서 아무도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았다. 과도한 세금은 정부에도 부담이었기에 정부는 세금 대신 돈을 찍어내는 쉬운 방법을 택했는데, 결과는 치솟는 인플레이션이었다. 한편 자본주의의 병폐를 막겠다며 만든 국영기업과 공기업은 세금 먹는 하마와 같았다. 어차피 적자를 봐도 정부가 보전해줄 것이기 때문에 경영이 매우 부실했던 것이다.

1945~1975년의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첫째, 부의 창출 없는 복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짓이다. 둘째, 정부가 집행하는 예산, 즉 남의 돈을 남이 쓰는 식의 지출은 절대 효율적일 수 없다. 셋째, 복지제도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크게 효과적이지 못했다. 넷째, 일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하기 싫어서 정부에 의존하는 도덕적 해이가 심각했다. 1998년에 영국에서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진정 원하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만 실업 수당에 얹혀산다’고 답한 사람이 31%나 됐다. 마지막으로, 국가가 너무 비대해졌다. 1996년 당시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지출이 스웨덴은 71%, 덴마크는 60%에 이르렀다.

심각한 문제점이 노출됐지만 오늘날 복지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는 것이다. 다만 원칙을 세우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복지 지출이 경제 성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일하지 않는 사람의 소득이 일하는 사람의 소득보다 많으면 안 된다’는 것, 국가권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복지를 둘러싼 분쟁이 심각해지고 있다. 보편적 복지와 집중적 복지가 충돌하고, 지원금을 타기 위한 사기행각도 발견되며, 적당히 일하고 많이 놀려는 도덕적 해이도 포착된다. 적자 재정을 미래 세대에 떠넘기려는 정부 의식은 매우 심각한 상태다. 무엇보다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실, 그리고 과세 없는 복지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내 주머니 돈이 아니면 상관없다는 태도는 조만간 내 주머니도 안전하지 않게 만들 게 뻔하다. 한때 사회통합의 수단으로 간주되던 복지가 오히려 사회갈등의 원인이 돼버린 앞서간 나라들의 경험을 깊이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