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중국은 '적'이 아닌 '체제경쟁자'다
2년여 전 유럽연합(EU)과 중국 간에 표현을 놓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EU 집행위원회가 정책문서에서 중국을 ‘동반자(partner)’가 아닌 ‘체제경쟁자(systemic rival)’로 바꿔 지칭한 게 발단이었다. 브뤼셀 주재 중국대표부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겠다며 사전까지 뒤진 끝에 EU 측에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 “무슨 뜻인가? 우리가 적(enemy)이라는 얘긴가?” 2019년 3월 프랑스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며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시진핑이 뭐라고 하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고 발전시켜온 국가들에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적 일당독재를 고집하는 중국이 ‘체제경쟁자’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실용외교를 펴온 독일도 그즈음 “체제경쟁국인 중국에 자유 시장경제를 농락당할 위험이 크다”는 내용의 민관합동보고서를 내놓았다. 미국과 달리 중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EU와 회원국들이 중국 경계령을 발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부쩍 커진 경제력과 기술력, 세계 최대 시장을 무기 삼아 유럽 국가들을 힘으로 압박하고 길들이려는 중국의 행태가 노골화하고 있어서다.

EU의 ‘약한 고리’인 체코를 농간하고 겁박한 게 단적인 사례다. 중국 첩보기관이 체코 외교부의 이메일과 정책서류를 해킹해온 사실이 2018년에 드러났다. 중국이 통신장비 회사인 화웨이를 통해 세계 각국을 해킹하고 있다는 의혹이 커지던 터라 체코 정부는 화웨이 통신망 사용 중단 등 대응조치에 착수했다. 중국은 발뺌과 함께 노골적인 협박을 가했다. “화웨이를 건드리면 중국인들의 체코 관광이 금지될 것이고, 다른 경제 조치도 뒤이을 것이다.” 한국과 호주 등을 길들일 때 써먹은 수법이었지만 체코는 단호하게 맞섰다.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 합동대책을 마련했고, 다른 유럽 정상들을 초청해 인터넷 안보회의도 열었다.

EU 국가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을 이끌던 시절의 외교 폭주에 실망해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저울질했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대놓고 힘자랑을 하며 EU 국가들을 통제하려는 중국의 행태가 잇따랐다. 결정적으로 기를 질리게 한 사건도 2018년에 벌어졌다. 시진핑이 장클로드 융커 당시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EU 대표단을 베이징으로 불러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자랑하고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훈수를 늘어놓은 것이다. “중국의 국가주도 모델이 여러 면에서 탁월함이 입증됐다. 느려터진 유럽의 의사결정 체제와 격차 확대가 포퓰리즘을 부른다.” 융커 위원장은 “당신이 느리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고 응수했다.

서방 지역의 약한 고리를 한 곳씩 골라 괴롭히며 자유민주주의 동맹을 허물어뜨리려는 중국의 전술은 자유주의 진영을 뭉치게 했다. 미국이 2019년 인도와 일본, 호주와 손잡고 ‘쿼드(4개국 안보협의체)’를 가동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지난 1월 출범한 미국 조 바이든 정부는 쿼드를 확대해 중국의 ‘체제경쟁 야망’을 확실하게 꺾어놓겠다는 전략을 분명히 하고 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취임 후 첫 합동 해외순방 지역으로 한국과 일본을 선택한 데서도 확고한 의지가 읽힌다. 두 장관은 순방에 앞서 “우리가 힘을 모으면 중국의 공격과 위협에 훨씬 더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내용의 언론 기고문까지 내며 순방 목적이 중국 견제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반중(反中) 행보에 한국은 물론 일본 인도 호주 등 ‘쿼드’ 국가들도 부담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중국이 차지하는 경제 분야 비중이 막대해서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원칙 정립이다. “우리가 뭉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지, 중국을 적(敵)으로 돌리겠다는 게 아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면 중국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미국 정부도 중국과 궁극적인 협력 및 공존이 불가피함을 부인하지 않는 터다. 블링컨 장관이 “중국은 상황에 따라 경쟁 상대이기도 하고, 협력 파트너이기도 하며, 적대관계일 수도 있다”고 이달 초 발언한 대로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한국은 자유 시장경제 진영의 충실한 일원이며,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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