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건순의 제자백가] '살아가는 이유'를 바로 세워야
맹자에게 공도자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가 스승에게 물었다. 왜 누구는 대인이 되고 누구는 소인이 되느냐고. 그러자 맹자가 말했다. 인간 안에 대체(大體)라는 것이 있고 소체(小體)라는 것이 있는데 대체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고 했다.

대체라는 큰 것은 무엇이고 소체라는 작은 것은 무엇일까. 큰 것은 중요한 것이다. 본질적인 것이다. 내가 평생 가야 할 길이고 내 인생의 올바르고 궁극적인 방향성이다. 소체, 작은 것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비본질적인 것이다. 사소한 것이다. 눈앞의 욕망이고 사사로운 욕심이다. 생각 없이 살면 그 작은 것에 끌려다니게 되는데 그러면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답할 수 없는 인간이 된다. 그렇기에 맹자는 대체에 집중하라고 했다. 그래야 덕이 있는 사람이 되고 단단한 자기의 중심이 서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이 된다고 했다.

이렇게 대체와 소체를 언급하면서 맹자는 결론으로 선립호기대자(先立乎其大者)라는 것을 말했다. 먼저 큰 것을 세우고 항상 그 큰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언제든 시련에 굴하지 않고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대장부로 살 수 있다고 했다. 자기 주관과 줏대가 확실하기에. 그런데 나는 선립호기대자라는 것을 단순히 주관과 줏대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과 연관지어 해석해 본다.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고난이 엄습해 오는 게 인생살이다. 그때 나를 지탱하고 인내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살아가는 이유다. 그런데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은 거저 만들어지고 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아 보려 애면글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왜 공부를 할까? 나는 왜 일을 할까? 나는 왜 회사에 다닐까? 하는 질문들 말이다. 그렇게 질문하면서 스스로에게 납득이 가는 답을 해보려 많이 고민해 봐야 살아가는 이유가 또렷해질 것이다. 그런 질문들은 참 심심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성실하게 자문자답하려고 해야 한다. 삶에서 근원적인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건강을 잃은 뒤에 건강을 지키려고 하면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소중한 것은 항상 잃기 전에 지켜야 하는 것처럼 고난이 오기 전에, 내 삶이 정상일 때, 내가 지금 하는 일과 업, 소속된 곳의 의미를 물으며 내 삶의 근원적, 근본적 의미와 방향을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또렷해지게 하고, 분명해지게 하는 것이 맹자가 말한 선립호기대자이고, 대체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닐지. 진정으로 건강하고 튼튼한 자아를 세우는 것 말이다.

안 그래도 요즘 벼락부자와 벼락거지라는 말이 같이 유행하고 있다. 부동산 폭등이 낳은 결과다.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 갑자기 가난해진 사람, 처지가 극명하게 갈렸지만 양자 모두 내면이 건강치 못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일할 맛이 안 나고, 노동의 가치가 하찮게 느껴지고, 내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이들이 자아가 허약해졌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나의 대체가 뭔지,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본질적인 것을 늘 단단히 세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의 단위를 사회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그 큰 것 먼저 세우는 것이 절실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사실상 내전 중인 사회 아닌가. 압축 성장에는 성공했지만 아직도 국가 건설을 못 한 사회이고. 시민종교도, 공유가치도, 국부(國父)도 없는 사회,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도 중심이 없어 보이는데 사회에도 선립호기대자를 주문하고 싶다. 극단적인 진영 갈등과 정치 투쟁을 단순히 잘 관리하고 조율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 사회 구성원이 동의하고, 전 국민을 아우르는 어떤 공유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으로 가는 것 말이다. 개인들도, 사회도 큰 것부터 바로잡고 늘 그것을 부여잡으려고 하자. 모두가 커지고 사회도 건강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