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 복지, 보편 복지 담론은 ‘대중인기영합주의’에 기초한 허구다. 집권층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 아니라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일이며,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돼야 할 복지 재정을 기준 없이 남용하는 것이다. 국민들의 피땀 어린 돈을 거둬서 푼돈으로 쪼개 길바닥에 뿌려대는 것이다. 그러고선 마치 위대한 지도자께서 고달픈 민생을 걱정하셔서 용단을 내린 것처럼 생색을 낸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활개를 치던 무상 복지 논란이 그랬다. 무상 급식이니 반값 등록금이니 하는 얘기들이 찬반양론으로 갈라지면서 정가와 사회를 들썩이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주장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급식비 지원만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하는가. 모든 선별적 복지 정책이 알게 모르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상대적 박탈감이 걱정된다면, 사회생활, 인간관계, 경쟁구도 등 일상에서 각자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어떻게 달래줄 것인가. 정부가 나서서 “사회에서의 모든 경쟁을 금한다”고 명령할 것인가.

그렇게 무상 복지의 망령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 동안 오히려 강성해지다가 오늘에 이르게 됐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기본소득’이라는 탈을 쓴 ‘현금 복지’로 되살아난 것이다. 이미 사회는 방역이라는 미명 아래 국가의 지나친 통제와 간섭을 받고 있고, 남발되는 행정명령으로 개인의 일상까지 침해당하고 있다.

분배 담론이 세를 얻으면 성장 담론은 죽기 마련이다. “일단 퍼주고 퍼먹고 보자”는 식의 ‘나랏돈 갈라먹기’에 빠지면, 신산업 육성이나 첨단 기술 발전 등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미래 담론은 조명받지 못하게 된다. 무차별적인 현금 복지에 익숙해지면 개인은 정부 배급에 의존하는 ‘노예의 길’을 걷게 되고, 나라의 곳간은 비어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위정자들이야 무상 복지를 한철 매표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지만, 그 책임과 후과(後果)는 지도자를 잘못 뽑은 국민의 몫으로 남는다.

신승민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