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AI·비대면 등 첨단산업에만 관심
뿌리산업 등 전통제조업 경쟁력 높여야

이정선 중소기업부 차장
[편집국에서] 인공지능만큼 중요한 볼트와 너트

중소기업인 신년인사회가 열린 지난달 1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관.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2021년 중소기업 정책 방향’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약 20분간 이어진 발표의 키워드는 ‘디지털 경제’ ‘비대면 산업’ ‘프로토콜(규약) 경제’ ‘혁신 벤처기업’ ‘가상·구독경제’ 등이었다. 중소기업의 핵심 영역인 제조업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대부분 공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인이었다.

정부의 무관심 때문일까. 첨단산업을 칭송하는 온갖 레토릭 속에 묻힌 중소제조업의 환경은 심상치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각종 규제로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있어서다.

관련 지표를 보자. 공장 가동률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다. 지난해 11월 대구와 구미국가산업단지 가동률은 각각 53%, 61%에 그쳤다. 산업단지의 공장 처분 건수도 2019년 1484건에서 지난해 1773건으로 19.4% 늘었다. 특히 제조업의 기반인 주물, 금형 등 ‘뿌리산업’은 그야말로 고사 위기다. 중소제조업을 운영하는 기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계상황에 이르고 있다”고 우려한다.

경제의 성장 엔진인 제조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내 제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29.3%를 차지한다. 일자리의 원천도 제조업이다. 제조업이 창출하는 민간 일자리는 전체 산업 가운데 가장 많은 400만 개에 이른다. 더욱이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에서 제조업의 존재 의의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코로나19 충격을 완화하는 데 버팀목 역할을 한 것도 제조업이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 경제의 진정한 영웅은 제조업”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제조업은 한물간 산업이 아니다. 중소제조업의 기반인 뿌리산업에 속하는 주물, 금형업 등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한때 큰 격차가 있던 일본과의 기술력 차이도 거의 없는 수준이다. 한국의 자동차나 휴대폰 수출은 이런 중소기업들의 부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해외에선 한국의 뿌리산업을 첨단산업으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제조업의 중요성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로봇 등 첨단기술은 전통제조업과의 융·복합 작업을 통해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경계가 없어지는 ‘신(新)제조업 시대’도 열릴 전망이다. 독일, 미국, 영국 등이 제조업 강화에 나선 건 이런 산업사적 흐름과 무관치 않다. 이런 맥락에서 화학물질관리법, 주 52시간제, 최저임금 인상, 중대재해처벌법 등 중소제조업을 옥죄는 규제가 해마다 쏟아지는 현실은 시대착오적인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2021년 현재 제조업이 지니는 시대적 함의를 정부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예를 들어 3만2000여 개에 이르는 뿌리기업을 지원하는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에 중기부가 지원하는 예산은 연간 60억원 선에 불과하다. 올해 중기부가 비대면 스타트업에 쏟아붓는 예산(300억원)의 5분의 1 수준이다. 스타트업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냄비처럼 달궈지고 있는 쏠림을 경계하자는 얘기다. 정밀하게 가공된 볼트와 너트가 없으면 전기차도, 드론도 만들 수 없다. 1986년 공중에서 폭발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사고 원인은 ‘고무 패킹(O-ring)’의 불량 탓이었다.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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