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의 법과 법정] '司法 위기' 부르는 사법에 대한 몰이해
오늘도 법원 입구에서는 사건 관련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녹음된 고함 소리를 스피커로 되풀이하던 시위는 끝난 모양이다. 법원에서는 늘 수많은 사람의 각자 나름대로 중요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것을 한꺼번에 방해하면서까지 자기주장만 관철하겠다니 그 아집의 완고함에 말문이 막힌다.

재판은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주장과 입증이 이뤄진 후 최선의 옳은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누구의 목소리가 큰지, 어떤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은지는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을 잘 정리해 신빙성 있는 증거와 함께 제출하는 것이 승소하는 길이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시위를 한다. 판사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을 시위에 동원하는 능력이나 재판을 맡은 판사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능력을 경쟁해 승리한 사람이 재판에서도 승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재판이 우리 헌법질서 속에서 무슨 가치를 가질 것이며, 소수자 보호는 어디에 기대야 할까. 현대 민주사회에서 ‘다수의 독재’는 늘 경계의 대상이다. 이것이 재판 제도에까지 손을 뻗친다면 유권무죄 유전무죄의 적나라한 실력행사가 허용되는 비문명 사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주요 공직자들은 선거로 뽑는다. 유권자들은 선출직 공무원에게 당연히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 있고, 여론은 입법이나 행정 정책을 입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시민들이 할 말이 있으면 의회나 행정부 주변에서 시위를 한다. 그러나 법원 입구에서 시위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법의 지배를 부정하며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양심과 상식을 거론하는 것도 봤고, 판사가 전지전능한 것도 아닌데 재판을 진실이라 믿고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봤다. 정치 권력과 힘을 합쳐 사법의 독립을 위해 힘쓰겠다는 말도 들었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시민이 직접 선출한 공무원의 당선 유·무효를 법원이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불평도 들었다. 이런 모든 언행은 재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초하고 있다.

사법부와 재판에 대한 이런 오해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그사이에 오해에 기초한 잘못된 정책이 입안되고 실행된다. 사건 관계자가 판사와 학교 동창이라 사건을 재배당하는 제도는 아마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 같다. 존재가 입증되지 않은 전관예우를 전제로 이런저런 제도가 거듭 도입된다. 대중의 편견에 영합하는 것이어서 나름 인기는 있다. 그러나 입법자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인상에 좌우되는 제도 개선은 거의 언제나 실패하게 마련이다. 제도에 대한 올바르고 깊이 있는 이해가 우선해야 그 위에 설계된 제도 개선이 성공할 수 있다.

미국에서 ‘사법의 위기’에 관한 법률가협회 보고서가 제출된 적이 있다. 사법부가 독립적으로, 공정하게,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사법부를 잘 이해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며 그에 기초한 신뢰만이 사법부의 올바른 작동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대법원장도 “정부 관련 법원 판결에 대한 반응을 보면, 법원의 역할과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에서 나아가 법원의 동기에 대한 의심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나고 있다”며 사법부에 대한 이해 부족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배심재판을 하면 많은 시민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직접 관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 학교 교사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견학 프로그램도 비교적 잘 시행되고 있다. 법정 드라마나 법정 소설도 법률가들이 직접 쓴 수준 높은 것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사법에 대한 이해 수준이 우려된다면 우리는 과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법원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지 관심을 갖고 살펴봤지만 미흡하기 짝이 없다. 이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집단은 법원일 수밖에 없다. 관련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법률 교육과 홍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