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커져가는 기업의 '정치 리스크'
우리에게는 정치권력이 기업과 기업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뿌리 깊은 역사가 있다. 조선시대의 주자학적 사농공상 통치이념이 그 뿌리다. 사대부와 양반이 권력을 장악하고 상업과 무역을 담당했던 상인을 천대했으며 종종 그들의 재산을 수탈했다.

변승업은 조선 제일의 부자였다(이수광, 《조선 부자 16인의 이야기》). 그는 숙종 때 역관을 지내며 일본과 중국을 상대로 중개무역을 해 많은 돈을 벌었다. 장희빈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한 남인들에게 밀려난 서인들이 생활이 어려워지자 변승업에게서 돈을 빌려갔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자 이제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변승업은 평소 친분이 있던 동래부사가 일본 대마도주에게 뇌물을 받고 탄핵당했을 때 의금부에 같이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서인 송시열 문하이던 동래부사는 얼마 안 돼 풀려났지만, 변승업은 여섯 달 넘게 의금부 감옥에서 고생했다. 서인들이 돈을 빌려준 변승업을 옥에 오랫동안 가둔 이유는 자신들의 말을 잘 듣게 길들이기 위함이었다. 변승업이 사람들에게 빌려준 돈이 자그마치 은 50만 냥, 지금 돈으로 1500억원에 달했고, 돈을 빌려간 사람 대부분이 권력자였다. 변승업은 죽기 전에 후손들에게 회계장부를 불태우라고 지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돈을 갚기보다 너희를 죽이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끝내 구속됐다. 대통령에게 잘못 보이면 어떤 기업이든 하루아침에 날아갈 수 있을 만큼 한국의 정치권력은 대단히 크다. 그런 현실에서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이것을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은 ‘묵시적 청탁’이라 하며 실형을 선고했다. 명확한 증거가 아닌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판결할 수 있는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법적 처리와 연결되지 않았다면 그런 판결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이번 사법부의 결정이 정치적 결정과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부회장의 구속은 한국의 기업이 얼마나 많이 ‘정치 리스크’에 노출돼 있는지 보여준다.

현 정권 들어 기업의 정치 리스크가 더 커졌다. 기업 활동을 옥죄는 규제가 많이 늘어 정치권력이 행사할 수 있는 범위도 더 넓어졌다.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관련된 기업 규제들, 지난해 말 국회에서 통과된 기업규제3법, 최근 제기되고 있는 이익공유제 등으로 기업 경영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개입이 심해졌다. 게다가 산업안전보건법 강화, 화학물질관리법과 화학물질평가법 강화, 올초 통과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안전, 보건, 환경규정 미준수나 작업장에서 사고가 나는 경우 사업주를 처벌할 수 있는 벌칙 규정이 2500개가 넘는다. 여차하면 교도소행이다.

이렇게 기업 환경이 악화된 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농공상 관념에다 기업과 기업가에 대한 몰이해가 더해진 탓이다. 친노조·반기업 성향의 현 집권세력은 기업과 기업가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정부의 기업 활동에 대한 간섭과 제한이 맹렬하다.

그러나 기업가는 경제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임을 알아야 한다. 기업가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기회를 본다. 시장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 제품을 개발하며 이윤 기회를 본다. 그런 기회를 보는 것이 기업가 정신이고, 기업가 정신은 탁월한 상상력과 비전, 창의성에서 나온다.

그런 기업가의 운명은 소비자들이 결정한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가장 저렴하고 가능한 한 최선의 방법으로 제공하면 이윤을 얻고 기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손실을 보고 결국에는 기업가의 위치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런 기업가의 활동으로 사회의 희소한 자원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가치가 창출돼 경제가 성장하며 일반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된다. 부유한 기업가가 많은 나라일수록 일반 국민의 생활 수준이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처럼 정치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는 기업가 정신이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반 국민의 생활 수준 하락과 국가 쇠락으로 이어진다. 정치권력을 줄여 정치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 거기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