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민주적 통제 혹은 민주적 독재
흔히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지만 문재인 정부야말로 언어의 마술사다. 교묘하게 언어를 비틀어 정치적 효과를 누려왔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의료 인력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시민들의 인내와 협조가 없었으면 재난적 결과를 가져왔을 어정쩡한 코로나 방역정책을 ‘K방역’으로 포장해 한류의 긍정적 이미지에 편승한 것도 그중 하나다. 단연 압권은 ‘민주적 통제’일 것이다.

민주적 통제란 말은 과거에도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사용하던 말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권력기관에 대한 개혁의 근거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올해부터일 것이다. 지난 1월 3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취임사에서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속도를 내겠다고 하면서 이른바 검찰개혁의 근거로 사용했다.

민주적 통제,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가! 국민이 주인인 ‘민주’는 사실상 모두가 받아들이는 이상이다. 그래서 건국 이후 지금의 여당을 포함해 많은 정당이 당명으로 사용해 왔다. 거기에 더해 한때 무소불위라고 여겨지던 검찰권력을 ‘통제’한다고 하니 ‘민주적 통제’라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게 들렸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그저 좋은 것이려니 생각했다. 멋대로 국민을 괴롭히는 깡패 집단을 길들이는 것쯤으로 보고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민주적 통제의 실상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는 딴판이었다. 정권의 핵심부로 향하는 검찰 수사의 예봉을 꺾는 게 거의 전부였다. 거듭된 검찰 인사를 통해 수사팀을 와해시키고 스스로 임명했던 검찰총장의 손발을 잘라냈다. 나중에는 검찰개혁이란 이름으로 검찰총장을 찍어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하라고 당부했던 바로 그 권력이 불리한 수사를 한다고 검찰을 뒤집어엎고 총장을 겁박한 것이다. 갖은 압박에도 불구하고 검찰총장이 버티자 임명된 권력이 선출된 권력에 맞선다는 말도 뱉어냈다. 결국 민주적 통제의 미명을 내건 검찰개혁은 실상 검찰을 선출된 정권의 말 잘 듣는 개로 만드는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검찰총장에 대한 직무배제와 정직 시도는 일단 법원의 판결로 제동이 걸렸다. 그러자 “일개 판사”가 총장의 임기를 보장해 줬다는 친여 인사의 발언도 있었고 검찰총장의 징계를 법원에서 다투지 못하게 막자는 법안도 발의됐다. 여권 일각에서는 숫제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자는 이야기도 있었고 검찰총장을 탄핵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민주적 통제보다 중요하냐는 말도 있었다.

이런 얘기들은 모두 민주적 통제에 대한 크나큰 오해와 왜곡에서 비롯한다. 사실 민주적 통제는 민주주의의 어원적 의미와 동일하다. 민주주의는 인민(demo)과 통제 혹은 지배(kratos)를 합친 말이다. 민주주의라면, 민주적 통제는 모든 권력에 적용된다. 임명된 권력만이 아니라 선출된 권력도 대상이다.

선출된 권력의 경우 국민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에서 일단 정당성을 누린다. 그렇다고 해서 무제한적인 권력 행사가 허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출된 권력이라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국민이 일상적으로 권력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평상시 민주적 통제를 제도적으로 담보하는 장치가 견제와 균형이다. 삼권분립과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검찰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출된 권력이라고 해서 민주적 통제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임명된 권력이라고 해서 선출된 권력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헝가리와 폴란드같이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나라에서 선출된 권력이 가장 먼저 손을 보는 것이 사법부와 검찰의 독립성이다. 선출된 권력이 임명된 권력을 억누르는 데 사용하는 민주적 통제는 민주적 통제가 아니라 ‘민주적’ 독재, 즉 민주주의의 허울만 빌린 독재와 다름없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우려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야당이 반대하는 공수처장은 임명될 수 없다는 게 거의 유일한 중립성 보장 장치였지만 이마저도 공수처법이 개정되면서 사라졌다. 검찰의 권한을 제한하는 데는 기여하겠지만 그 공수처가 선출된 권력의 시녀가 되는 것은 누가 막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