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전심치지(專心致志)
오늘은 학생들의 성적을 제출하는 날이다. 강단에 서는 사람들에게 성적을 제출하는 날은 방학이 시작된다는 것이라 살짝 느껴지는 해방감이 있었는데, 올해는 영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학생들에게 한 말을 받고 한 됫박도 돌려주지 못한 미안함이 가득해서다.

그런 마음으로 저물어가는 2020년의 끝자락을 지키고 있다. 습관적으로 한 해를 정리해보고 싶다. 올해 초 나는 모 방송국의 여행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돼 중국에서 한 달을 보냈다. 이어서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그분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방송에도 나갔다. 방송 횟수로 치면 열여덟 번에 불과했는데, 시장에 가면 텔레비전에 나온 분 아니냐고 알아보시는 분도 계시니 신기하기만 하다.

내가 요리하기 시작한 지 33년이 넘어간다. 30년이 넘었다고 하면 세월만으로도 대단한 내공이 느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저 세월이 쌓여서 무게가 됐을 뿐이다.

1980년대 후반에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집 주방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대학을 가르쳐놨더니 중국집에서 식모살이하느냐”고 하셨고, 어머니는 “그릇 팔러 다니냐”고 하셨다. 내가 일하던 중국집에 오시는 손님들은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하셨다.

‘중국집 주방에서 요리하는 여자’는 전국의 모든 중국집을 뒤져봐도 찾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어른들의 그런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8년간 튀김 분야에서 탕수육에 들어가는 고기를 튀겼다. 기본은 닦았다 싶어 중국집을 나와서 집집이 찾아다니면서 요리를 가르치는 방문 요리 선생을 했다. 조그만 가게라도 내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도 없었다.

출장요리사를 했고 지방 대학 평생교육원의 강사로도 수년을 다녔다. 요리사로서 삶을 개척하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뛰어 탈진해서 그나마 몇 푼 번 돈을 약값으로 써버린 적도 허다했다. 오랜 시간 무거운 짐을 나르고 프라이팬을 돌리느라 어깨통증이라는 고질병을 얻었다.

나는 무엇으로 그 시간을 견디었을까. 대학교 3학년 때 중국인 교수님으로부터 맹자를 배웠다. 《맹자·고자상》에 나오는 혁추는 바둑을 아주 잘 두는 사람이다. 혁추가 바둑을 가르칠 때 한 사람은 바둑을 잘 배우기 위해 전심으로 바둑에만 전념했고, 한 학생은 바둑을 배우면서도 날아가는 새를 무엇으로 잡으면 잘 잡힐까를 궁리했다. 그 두 사람이 이룬 결과는 어떠했을까.

오로지 한곳에만 전념함을 뜻하는 ‘전심치지’는 그 후로 내 삶에 좌표가 됐다. 그래서 매번 힘든 상황에서도 이 말뜻을 되새겨 봤다. 올해는 너나 할 것 없이 살아내기에 힘이 많이 필요했다. 새해에도 더욱더 힘을 내보자. 한곳에 마음을 두고 유쾌하고 경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