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디스토피아 부를 '586 정신승리'
“민주화운동이나 민중항쟁이 아니다. 광주 무장봉기로 불러야 한다.”

5월 광주를 폄훼하려는 강성 우파의 주장이 아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총책 백태웅 씨가 1989년 한 좌파 잡지에 기고한 글이다. 무장을 통해 권력 탈취를 시도하고, 해방을 꿈꿨던 영웅적 투쟁을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명칭은 ‘무장봉기’라고 그는 강조했다. “반란이요 혁명이며 주권 탈취의 한판 싸움이었다”고도 했다.

민주화 유공자이자 이름값 높은 백씨지만 이제 이런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려면 ‘콩밥’을 각오해야 한다. 5·18 특별법에 ‘허위사실 유포 금지’ 조항이 신설돼서다. 정부 판단과 다른 사실을 퍼뜨리면 ‘5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니, 정말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나라다. 문명세계의 보편적 규범인 사상·표현의 자유는 온데간데없다.

반민주·반자유의 '입법 테러'

586 운동권 집권 3년여 만에 반민주·반자유 악법이 홍수다. 견제없는 우월적 지위 탓에 중국 국가감찰위원회나 북한 보위부에 비견되는 ‘괴물 공수처’는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공수처장부터 수사 검사까지 입맛대로 임명한다면 중립·독립이 생명인 수사권은 정권 사유물로 전락하고 법치는 쇠락할 수밖에 없다. 대북 전단 살포나 확성기 방송을 처벌하는 ‘김여정 하명법’도 기어이 통과됐다. 세계 최악의 전제정권에 대항하는 유용한 수단을 자진포기하는 것은 북녘 동포를 폭정 속으로 더 깊숙이 밀어넣을 반(反)인권적·반문명적 행태다.

철지난 이념을 앞세워 시장질서를 교란하는 경제 입법도 봇물이다. 오래전 정경유착 시절의 기업관(觀)에 사로잡힌 한줌 좌파 시민단체에 휘둘려 ‘3%룰’ ‘다중대표소송제’ ‘출자 제한’ 등 세계 유일 규제가 대거 도입됐다. 무자비한 투기자본이 기업의 심장인 이사회에 잠입하도록 특혜를 주고선 ‘소액주주 보호’라며 자화자찬 중이다. 원조인 독일도 울고 갈 세계 최강 ‘노동이사제’, 모델로 삼은 영국 법에도 없는 기업인에 대한 행정·민사·형사 ‘3중 처벌법’도 카운트다운이다.

입법 과정에서의 독선과 독설, 궤변과 위선은 좌절감을 배가시킨다. 적법 절차와 약속을 무시하고 언론 접근도 차단한 채 ‘떼의 힘’을 과시하는 장면의 무한반복이다. 민주공화국을 지탱하는 자유·평등·인권 같은 절대가치도 다수결로 제압 가능한, 거추장스러운 대상에 불과하다. 하다하다 ‘윤석열 대선 출마금지법’까지 만든다니 마키아벨리가 두손 들 판이다.

머리·용기 없는 'B급 586'

이 모든 입법 테러에 여권은 ‘공정’과 ‘개혁’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악행이 가장 잔혹한 독재’(몽테스키외 《법의 정신》)라는 경구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선민의식에 빠져 세상 무서운 것 없다는 듯 폭주하는 집권 586의 주력은 기실 B급 운동가들이다. 동년배의 A급 운동가 대부분은 한때 빠졌던 감상적 민족주의와 교조적 계급주의를 극복하고 정상궤도로 복귀했다. 양대 계파인 NL(민족해방) 원조 김영환은 목숨 걸고 북한인권운동에 뛰어들고, PD(민중민주) 상징 박노해는 자유·보수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 ‘자유의 확장’이라는 대의에 헌신한 4·19 세대 및 6·3 세대와의 화해이기도 했다.

머리도 양심도 용기도 없는 B급 운동가들만 생계형 네트워크로 치달으며 진보운동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있다. ‘민주화 적자’를 자처하는 정부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게 될 줄이야. 대통령과 여당 대표는 입법 폭주를 ‘개혁’이자 ‘역사적 성과’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위정자가 정신승리에 탐닉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것, 디스토피아로 향하는 길이다.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