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수첩은 디지털 날개를 달고
나는 수첩을 무척 좋아한다. 컨설턴트라는 직업상 남을 인터뷰하거나 글을 쓸 때 항상 수첩을 소지하고 다니면서 기록했다. 3~4년 전부터는 스마트폰에서 에버노트를 쓴다.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마다 에버노트에 잔뜩 써놓았다가 노트북으로 옮기거나 지인들에게는 카톡으로 바로 보내기도 한다. 에버노트에 익숙해지면서 몰스킨과 같이 아날로그 스타일의 수첩은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비교적 글을 자주 쓰는 편에 속한다. 세 권의 책도 출판했다. 잦은 출장으로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몇 시간이고 글만 쓰기도 했다. 수없이 다시 써야 하지만 과거 헤밍웨이처럼 찢고 버릴 필요 없이 노트북을 이용해 간단하게 타이핑하고 지우면 된다. 헤밍웨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시대에 태어나 이렇게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으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이렇게 획기적인 편리함을 주는 디지털 장비들이 하나둘씩 범용화되면서 아날로그 방식의 물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특히 아날로그 아이템의 대명사 격인 ‘수첩’은 가장 먼저 사라져버릴 구시대적 유물로 손꼽혔다. 수첩을 만드는 기업인 몰스킨에는 암담한 전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몰스킨은 오히려 이런 무시무시한 변화의 물결을 기회로 삼아 디지털 혁신을 통해 자사의 수첩에 자연스럽게 디지털 가치를 녹여냈다. 우선 몰스킨은 디지털 기업들과 협력해 기존의 수첩 고객들에게 새로운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몰스킨 수첩에 쓰거나 그린 그림은 에버노트, 라이브 스크라이브 펜, 어도비 등을 통해 이제 수첩 밖으로 나가 디지털 세상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디지털화된 노트는 휴대폰, 노트북을 포함한 어느 디지털 기기에서나 이용할 수 있게 구현됐다.

몰스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디지털 플랫폼인 ‘아티스트 마켓플레이스’를 도입했다. 몰스킨의 ‘스킨’은 표지를 의미한다. 몰스킨 고객들은 플랫폼상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스킨을 올려 판매할 수도 있고, 다른 이가 올린 스킨을 다운받아 자신만의 수첩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이제 몰스킨 고객들은 아이디어를 수첩에 기록해두는 목적을 넘어서 이를 표출하고 감상하는 경험을 디지털 플랫폼상에서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많은 기업인이 나에게 디지털이 가져오는 변화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장 사양산업이라고 생각했던 수첩 제조사인 몰스킨의 이야기를 꺼낸다. 디지털이 가져오는 변화를 이용해 자사 제품의 핵심 가치는 보존하면서 그 위에 디지털의 편의를 더한 몰스킨의 선택은 디지털 시대에 방황하는 기업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그들 역시 몰스킨과 같이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이를 기회로 삼아 자사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