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들어 예비타당성(예타) 조사 면제 사업 규모가 88조원을 넘겼다는 소식은 먼저 귀를 의심케 한다. 이전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반 동안 면제 사업을 합친 규모(83조9000억원)를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예타 면제 대상이 주로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사업이란 점에서 과거 정부를 ‘토건(土建) 정부’ ‘토건족(族)’이라고 맹비난해온 정권이 맞나 싶을 정도다.

처음엔 아동수당, 청년 일자리 사업 지원 등에서 예타를 면제해온 정부는 지난해 남부내륙철도, 충북선 고속화를 시작으로 올해 남북교류협력사업 명목의 동해북부선 강릉~제진 철도건설에 이르기까지 면제 대상을 SOC 쪽으로 급속히 넓혔다. 급기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어제 가덕도신공항특별법을 발의하며 10조원대 대형 건설사업에 ‘예타 면제 조항’을 기어이 집어넣었다. 대구·광주신공항도 국비 지원과 예타 면제 혜택을 줄 수 있다며 지역민심 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어 내년엔 역대 정부 최초로 예타 면제 규모가 100조원 돌파는 물론, 자칫 110조원에도 이를 수 있어 보인다.

그래도 성에 안 찼는지, 당정은 야당인 국민의힘까지 끌어들여 예타 기준을 완화한다는 방침이다. 국가재정법상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 국비 300억원 이상 투입 사업’인 예타 실시 기준을 SOC 사업에 한해 ‘총사업비 1000억원 이상, 국비 500억원 이상 투입 사업’으로 높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급증하는 예타 면제 사업이 법 개정으로 더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됐다.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다른 지역 민심도 고려해 일종의 ‘토건 정치’를 본격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건설산업은 과거에 비해 많이 줄긴 했지만, 지금도 국내총생산(GDP)의 8.1%, 일자리의 7.5%를 책임지고 있다. 이런 산업을 효과 빠른 경기부양 통로로만 바라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경제기여도를 일부러 폄하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문 정부는 과거 야당시절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전형적인 ‘토건 정치’라며 비난하기 바빴다. 그러다 정권을 잡은 뒤에는 ‘국가균형발전’이니, ‘지역뉴딜’이니 하며 토건사업에 앞장서고 있으니 이중잣대도 이런 이중잣대가 없다. 정부가 ‘신(新)토건 정치’를 선언한 이상, 예산 낭비가 없도록 국민이 더욱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