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시험대에 오른 美 민주주의
사흘 뒤면 미국 대선(11월 3일)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축제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대선 이후가 불안하다. 대선 결과에 따라선 최악의 경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과 민주당 대선후보 조 바이든 지지자들이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만연해 있다.
지난 25일 뉴욕 시내 한복판에선 트럼프 지지파와 반대파가 난투극을 벌였다. 반(反)트럼프 시위대가 타임스스퀘어 근처에서 집회를 하던 트럼프 지지자들을 습격하면서 양측이 충돌했다. 이들은 서로를 “무정부주의자” “파시스트”라고 부르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 다음날 기자는 펜실베이니아주 리티츠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 유세장에 취재를 갔다. 현장에서 만난 한 트럼프 지지자는 “바이든이 지면 안티파(극좌파)가 폭동을 일으키고 방화를 할 것”이라고 불안해했다. 주변에서 만난 민주당 지지자들은 반대로 “트럼프가 대선에서 패하면 극우파가 난동을 부릴 것”이라고 걱정한다.

최근 미시간주에서 극우 성향 무장 민병대가 민주당 소속 여성 주지사를 납치하려고 모의하다 연방수사국(FBI)에 검거되기도 했다.

[특파원 칼럼] 시험대에 오른 美 민주주의
로이터통신과 입소스가 유권자 2649명을 조사해 최근 공개한 여론조사에선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의 16%, 바이든 지지자의 22%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패하면 시위나 폭력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다 보니 지금 미국에선 총기가 불티나게 팔린다. 며칠 전 버지니아주에서 만난 총기판매점 주인 버니 브레이너씨는 “총알 값이 코로나19 전보다 3배나 뛰었고 그나마 총알을 구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라고 했다. 인기 있는 일부 권총은 재고가 없다고 했다.
미국인이 총기를 구입하려면 FBI의 신원 조회를 거쳐야 한다. 올해 1~9월 이 신원조회 건수는 2882만 건으로 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98년 이후 최다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로는 40%가량 급증했다.

과거 총기 구매자는 주로 공화당 성향 백인 남성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민주당 지지자, 여성, 노인, 유색인종도 총기 구매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업계에선 보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인종차별 시위와 일부 지역에서의 폭동에 대선 이후 혼란 우려까지 겹친 결과다. 뉴욕타임스가 얼마 전 ‘분열된 나라, 한 가지엔 의견일치: 많은 사람이 총을 원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승자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과제는 분열된 미국 사회를 다시 하나로 묶는 일이 될 것이다. 국민 통합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취임 초에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제 그렇게 된 대통령은 많지 않다. 한국도 비슷하다.

국민 통합이 대통령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모든 정치인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하는 과제다. 하지만 누구보다 대통령의 책임이 큰 것 또한 사실이다. 대통령이 특정 당파의 수장이 아니라 국가 지도자로 기억되려면 더더욱 그렇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여러 의견이 부딪칠 수밖에 없다. 강압과 폭력이 아니라 합의와 조정을 통해 의견을 수렴해나가는 게 민주주의다. 진영 논리와 편가르기가 아닌, 건전한 상식과 원칙이 중요한 이유다. 이 과정에 실패하면 정치 혐오와 분열이 커지고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공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 “극단적인 당파적 양극화가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파멸적 당파싸움을 피하고 민주주의를 지킬 해법으로 “(정당들이)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이는 관용과 그들에게 주어진 제도적 권리를 오로지 당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절제”를 꼽았다.

작년 이맘때 인터뷰한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조언도 떠오른다. 그는 정치적 양극화를 좁힐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좋은 리더와 나쁜 리더의 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좋은 리더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기용해 그들의 우려를 자신의 정책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인, 4년 전보다 더 분열"

“2016년 대선 때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들은 거의 모든 사안에서 의견이 달랐다. 현재 트럼프와 조 바이든 지지자들 간에는 이 차이가 훨씬 더 커졌다.”

미국 사회조사 기관인 퓨리서치가 지난 9월 올해 대선에서 투표할 예정인 유권자 1만1001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내린 결론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보다 훨씬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에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지자는 74%가 동의했지만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는 9%만 공감했다. 4년 전 동의율은 힐러리 지지자가 57%, 트럼프 지지자가 11%였는데 갭이 더 벌어진 것이다.

퓨리서치는 이밖에도 여성 차별, 이민자의 미국 사회 기여, 가족의 역할 등 정치적·사회적 가치에서 양측 간에 현격한 인식 차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인들은 이미 2016년 대선 직후 갤럽 여론조사에서 77%가 “가장 중요한 가치에 대해 미국이 분열돼 있다”고 답했다. 이는 갤럽이 이 같은 설문조사를 시작한 199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다. ‘미국이 분열돼 있다’는 응답은 2001년 9·11테러 직후엔 24%에 그쳤지만 이후 계속 높아졌다.

갤럽은 당시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서로 다른 정당 간에 정치 의제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