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배려, 베풂, 나눔을 실천할 용기
강원 횡성에서 가장 높은 산인 태기산 기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지인이 있다. 지난 주말 그를 만나고 왔다. 비포장 외길을 몇 굽이 돌아야 하는 외딴곳이지만 어느 명산에 비할 나위 없는 경관이다. 절정의 단풍이 마치 나의 방문을 환영하는 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행복해 보였다. 얼굴도 구릿빛의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의 입에서는 15년 묵은 산더덕 이야기, 산수화에나 나올 법한 집 앞 바위 이야기, 태기산 정상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청정수 이야기, 십여 리 떨어진 곳에서 7년 전 귀농해 유기농 포도를 재배하는 아저씨 이야기 등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예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었다. 오랜만에 맡는 사람 사는 냄새였다.

베이비붐 세대인 그는 자식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는 않겠다는 일념으로 평생 일만 해 온 사람이다. 그런 그를 무엇이 이렇게까지 행복하게 했을까? 궁금했다. 그는 “이젠 남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일한다”며 “원래의 내 모습을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사업할 때보다 더 바쁘지만 피곤한 줄을 모르겠단다.

도시에 살다가 시골살이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가장 값지게 붙들고 있던 무엇인가를 포기해야만 가능하다. 미련이 있어 잡고 있던 것을 놓는 순간, 비로소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결단이 대단해 보이는 이유다.

지인이 사는 20채 안팎의 동네에는 도시 생활에 지쳐 자연을 찾아온 외지인이 많이 산다고 한다.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들은 처음엔 도시에서처럼 이웃과의 교류를 어색해했다. 그러나 지인의 배려와 관심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베풂과 나눔을 통해 가까운 이웃사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지인의 옆집 정원에 모여 파티를 하는 자리에 “지인의 손님은 우리의 손님”이라며 초대해 줬다. 그 덕에 모닥불에 고구마를 굽고, 무수한 별들의 장식 아래에서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루 저녁 잠깐 만나 담소를 나눈 것뿐인데도 다음날엔 오랜 이웃처럼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꽈리는 물론 얼굴만큼 커다란 박도 따다 줬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웃의 정이었다.

우리는 원래 정과 흥이 많은 민족이다. 그런 유전자가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다. 지인처럼 먼저 손을 내밀고 배려와 베풂과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도시의 황량한 아파트 숲도 지인의 시골 동네 마을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유나 권력이나 명예로는 얻을 수 없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감동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지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귀경길은 너무 행복했다. 마음 가득한 행복은 한동안 나를 설레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