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높이를 '세계 최고'에 두고
끝없는 절박함으로 '초일류' 조련

근원 파고드는 질문으로
임직원들 '사고 혁명' 지휘
정치인·관료집단 따라 배워야

이학영 상임논설고문
[이학영 칼럼] 이건희가 대한민국에 던진 질문

삼성그룹이 수천 명의 대졸 신입사원 하반기 합격자를 발표한 2000년대 중반 어느 날,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의 표정이 무거웠다. “어젯밤 줄곧 뒤척이느라 한숨도 못 잤다”는 말로 운을 뗀 그의 얘기가 이어졌다. “저 많은 젊은이들이 부푼 꿈을 안고 삼성에 들어올 텐데, 우리가 그 꿈을 지켜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베개 밑 홑청이 밤새 흘린 땀으로 펑 젖어 있더라.” 10년 뒤, 20년 뒤에 혹시라도 ‘삼성이 아닌 다른 곳에 갔으면 훨씬 더 잘됐을 텐데’ 하는 후회와 원망을 듣는 일은 없을까에 생각이 미치니 더럭 겁이 나더라는 말도 했다.

이 회장이 ‘2류 전자업체를 세계 최대의 스마트폰·가전제품·반도체 회사로 탈바꿈시킨’(월스트리트저널) 원동력은 끝없는 위기의식과 절박감이었다. 사업이 잘될 때 오히려 앞날을 더 걱정하는 ‘강박적 위기의식’을 경영 간부들에게 끊임없이 주문했다. 삼성전자가 ‘부동의 세계 1위’였던 일본 소니를 시가총액에서 앞지르고 분기 영업이익이 처음으로 2조원을 넘어서면서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던 2002년 4월 사장단 회의 발언이 단적인 예다. “5년, 10년 뒤에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5일 타계한 이 회장 부음기사를 보도하면서 ‘삼성을 기술 분야에서 세계 리더로 만든 선지자(visionary)’라는 제목을 달았다. 선지자는 고독한 존재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광야에서 목 놓아 외치는 사람이 선지자다. FT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1993년 ‘신경영 선언’에서부터 15만 대의 불량 전자제품을 2000여 명의 임직원이 보는 앞에서 망치로 때려 부수고 불에 던져 태운 ‘화형식’에 이르기까지 이 회장의 치열했던 행적을 소개한 끝에 이 제목을 붙였다.

이 회장과 함께 일했던 삼성의 전문경영인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게 있다.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자신의 화두(話頭)를 임직원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신경영 선언’ 계기가 된 일본인 고문의 보고서 내용을 임직원에게 소화시킨 방법부터 그랬다. “삼성 엔지니어들은 공장 바닥에 공구가 흘러 다니는데도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는다”는 구절에 충격받은 그는 “그따위로 기본을 지키지 않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겠느냐”는 식으로 호통치지 않았다.

대신 “왜 그러는 걸까” “공구는 왜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가” “공장이 깨끗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는 질문을 이어 던졌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다 보면 “의식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일류제품을 만드는 일류기업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스스로 이르게 된다. 최소 다섯 차례의 질문을 통해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게 한 이 대화법은 삼성 경영간부들 사이에서 ‘5 WHY(왜?) 사고법’으로 체화됐다.

전문경영인들은 삼성이 환골탈태한 또 하나의 요인으로 이 회장 지시가 “방향이 분명하고 간결했다”는 점을 꼽는다. “이왕 만들려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잘 팔리는 제품을 만들라” “회장인 나보다 더 많은 봉급을 줘서라도 세계 최고의 인재를 모셔오라”는 식이었다.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명쾌한 지침이었다. 문제는 실행하고 달성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게 경영간부들의 몫임을 끊임없이 일깨웠다.

문제가 생기면 근본 원인까지 파고들어 바로잡고, 시선(視線)을 최고의 높이로 끌어올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고, 치열하게 찾아낸 최선의 방법으로 목표를 하나씩 이뤄나간 게 ‘이건희 혁명’의 요체다. 갓 채용한 청년 신입사원들에게 10년, 20년 뒤에도 실망하지 않을 최고의 직장을 물려주기 위해 밤잠을 설쳤던 치열한 기업가에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낡은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관료와 정치인들이 ‘3류, 4류’로 비쳐진 건 당연했다. 25년 전 그의 ‘베이징 발언’에 들끓었던 정치인·관료집단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 회장의 질문이 가슴을 때린다. 우리는 10년, 20년 뒤 어떤 나라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

haky@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