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생활경제부 기자
서울 이태원의 간판 없는 거리.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서울 이태원의 간판 없는 거리.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미국 뉴욕의 핫도그 가게 ‘크리프 도그스’는 17개 메뉴의 핫도그를 판다. 핫도그 맛이 뛰어나 문을 열자마자 단숨에 뉴욕 최고의 핫도그 맛집이 됐다. 창업자 둘은 2007년 핫도그 가게에 이어 술집을 새로 열면서 간판도 안 달고, 광고도 하지 않았다. 술집에 들어가는 방법은 단 하나. 핫도그 가게에 설치된 1930년대식 빨간 공중전화기를 이용해야 한다. 두 번째 다이얼을 돌리면 전화벨이 울리고, 예약했는지를 묻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이라는 뜻의 PDT(Please don’t tell)로 불리는 이 바는 지하의 비밀 술집으로 지금까지 성업 중이다.
대형 간판보다 '작은 로고'
[김보라의 공간] 간판이 사라진 시대

서울에서도 간판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 도시를 집어삼킬 것처럼 화려하고 번쩍이던 ‘간판 공해’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 새로 생긴 가게들은 아무 간판도 없거나 작은 로고만 하나 새겨 넣는다. 가게 주인들은 이제 ‘어서 들어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저 우연히 지나가다 궁금증을 갖고 들어오는 사람, 입소문으로 가게를 알게 된 사람, SNS에서 보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릴 뿐이다. 실제 공간과 상관없는 간판도 많아졌다. 목욕탕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마포구의 복합문화공간 ‘행화탕’, 옛 공장 시절의 간판인 ‘중앙감속기’를 레스토랑 이름으로 쓴 최현석 셰프 등은 공간의 의외성과 반전의 매력을 노린다. 을지로와 성수동 일대에는 이런 장소들이 부쩍 늘었다.

‘간판 없는 가게’는 수년 전부터 이태원, 한남동, 익선동 등 주요 상권에 등장했다. 요즘은 골목상권까지 파고들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동네 상권에 부쩍 관심이 커지며 간판 없는 가게는 더 늘었다. 사람들은 우리 동네 골목 어귀에 환하게 불을 켜놓은 공간을 보고 무심코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 대체 뭐 파는 곳이냐”고.

간판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간판이 존재했다. 벽에 하얀 도료를 바른 뒤 게시판을 만들어 정보를 줬다. 그땐 글자보다 그림이 많았다. 와인을 파는 곳엔 담쟁이 가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발소의 상징인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 역시 고대 이발사가 의사 노릇을 병행하던 시절, 피를 의미하는 빨간색과 붕대를 의미하는 흰색 조합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쇄술과 전기의 발명은 네온사인을 만들어냈다. 첨단 기술과 만난 간판은 도시 경관을 지배해 왔다. SNS가 대중을 사로잡기 전까지, 간판은 점점 더 크고 화려해졌다.

사람들을 알아서 찾아오게 하는 공간의 확대는 SNS가 파생한 결과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에 뜬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좌표’를 찾아간다. PDT처럼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도 작용했다. 조나 버거 와튼스쿨 교수는 이를 ‘소셜 화폐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은 기본적 욕구를 갖고 있고, SNS는 자신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해 줄 뛰어난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기업도 작은 가게도 SNS라는 공간에서 소셜 화폐를 잘만 활용하면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광고와 홍보가 되는’ 기적을 만날 수 있는 시대라는 뜻이다.
본질에 충실하겠다는 무언의 메시지
간판이 없다는 건 그만큼 본질에 충실하겠다는 무언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간판과 과장된 광고만으로 사람들을 어수룩하게 끌어모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뜻도 된다.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입소문만으로 어딘가를 찾아갔다면, 단 한 번의 경험이 압도적인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해야 지속 가능한 상업 공간이 된다. 애써 찾아갔는데 곳에 막상 음식이 맛없거나 공간 경험이 불쾌했다면 실망감은 더 크다. 소셜 화폐로서의 기능도 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더 많은 고민과 더 차별화된 아이디어, 본질에 충실한 상업공간을 선보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셰익스피어는 1623년 쓴 희곡 ‘좋을 대로 하시든지’에서 “술이 맛있으면 담쟁이 가지는 필요없다(Good wine need no bush)”고 일찍이 말했다. 본질이 훌륭하다면 화려한 간판이나 광고 따위는 필요없다고 간파한 것이다.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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