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경영·투자문화 정착 못 시켜
1974년 이후 3차례 기회 날려
한국도 일본 실패에서 배워야"

정영효 도쿄 특파원
[특파원 칼럼] 日, 이번엔 국제금융허브 성공할까

이익을 주주에게 환원하라. 신용거래를 억제해 투기의 장에서 건전한 자본조달의 장으로 전환하라. 기업 규모에 따라 시장을 구분해 기업이 자기자본을 충실히 늘리도록 하라.

얼핏 보면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대한 고언처럼 보이지만 실은 1974년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가 쓴 메모의 일부다. 그는 다니무라 히로시 신임 도쿄증권거래소 이사장에게 이 메모를 건네며 증시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문했다. 당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른 기세를 몰아 도쿄를 글로벌 금융중심지로 키운다는 구상이었다.

‘다나카 메모’는 20년 뒤인 1994년 다니무라가 한 주간지 창간기념호에 회고 형식으로 인용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이때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스타 칼럼니스트 가지와라 마코토가 칼럼에 다루면서 화제가 됐다. 다나카 메모가 화제인 이유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일본 시장의 과제를 정확히 지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일본이 지난 50년간 주식시장 개혁과 국제금융중심지 육성에 실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은 최근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으로 홍콩의 금융 지위가 흔들리는 틈을 이용해 또다시 국제금융허브 만들기에 도전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까지 나서 각종 세제혜택과 영어 행정서비스 지원, 영업면허 면제, 무료 사무실 임대 등을 내걸고 해외 금융사와 인재 유치에 발벗고 나섰다.

[특파원 칼럼] 日, 이번엔 국제금융허브 성공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도 일본의 시도는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 일본의 실패사를 되짚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일본은 다나카 메모 이후에도 두 차례 도쿄를 국제금융 중심지로 만들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닛케이225지수가 38,915로 최고치를 달리던 1980년대였다. 도쿄 중심지 호텔 로비에 있으면 뉴욕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월가의 거물들이 도쿄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거품경제가 붕괴하면서 도쿄는 추락했고, 대신 홍콩이 아시아 금융허브로 부상했다. 또 한 번은 1990년대 말 일본 정부의 ‘금융빅뱅’이었다. 당시 1200조엔에 달하던 개인의 예금을 주식으로 돌려 도쿄를 뉴욕, 런던에 맞먹는 국제금융센터로 키운다는 전략이었다. 내로라하는 금융회사들이 일본으로 몰려들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고객의 수익이 아니라 잇속이었다. 일본의 개인들도 그저 고객 돈을 빼먹는 데 눈이 벌게진 글로벌 금융사들에 돈을 맡기지 않았다. 두 번째 기회도 그렇게 시들고 말았다.

가지와라는 일본의 실패를 기업가치와 투자문화라는 두 축이 빠져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기업은 가치를 높여 주가를 올리고 금융회사와 투자자가 함께 윤택해지는 투자문화가 꽃피면 가계는 기꺼이 자산을 투자한다. 이런 선순환이 만들어지면 글로벌 금융사들은 다시 일본에 온다”는 것이다. 다나카 메모의 핵심도 도쿄증시를 건전하게 돈 벌 수 있는 시장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돈 냄새를 가장 잘 맡는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돈을 벌 수 있다면 세율과 언어장벽, 부동산 임차료, 면허취득 장벽이 아무리 높아도 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해외투자자들에게 일본 주식은 여전히 기피대상이다. 일본 기업들이 투자자를 위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소홀해서다. 작년 말 일본 상장기업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8%로 14%인 미국, 11%인 유럽은 물론 아시아 지역(9%)보다 낮았다. ROE는 기업이 주주를 위해 얼마나 이익을 올렸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주가순자산비율(PBR) 역시 9월 말 도쿄증시 1부 상장사 평균이 1.2배에 불과하다. 상장사의 50%가 PBR 1배가 안 된다. 같은 제조강국인 독일은 그 비율이 29% 정도다.

한국도 2003년 ‘동북아 금융허브’를 내걸고 17년째 국제금융허브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금융사는 오히려 줄었고 국제금융센터지수는 도쿄, 상하이 등 경쟁 도시보다 점점 처지고 있다. 9월 말 현재 우리나라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평균 ROE는 5.85배, PBR은 0.94배로 일본보다 낮다. 라임, 옵티머스 펀드 사태 등 불완전판매로 인한 ‘개미’들의 피해도 잊을 만하면 반복된다. 이웃 나라 총리의 50년 전 고언을 새삼 곱씹어보게 되는 이유다.
서울 국제금융지수, 경쟁도시와 격차 커져
서울 및 부산이 도쿄, 상하이 등에 비해 ‘국제금융도시 경쟁력’에서 갈수록 밀리고 있다. 지난 9월 발표된 영국 컨설팅그룹 지엔의 글로벌금융센터지수에서 서울과 부산은 각각 25위와 40위에 올랐다. 3, 4위를 차지한 상하이와 도쿄보다 순위가 크게 뒤처졌다. 뉴욕과 런던이 전 세계 금융 중심지 1~2위 굳히기에 들어간 가운데 홍콩이 차지했던 3위를 놓고 도쿄와 상하이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냉정히 말해 서울과 부산은 경쟁구도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기도 힘든 현실이다.

동북아금융허브의 깃발을 올린 지 10년째인 2015년엔 서울과 부산의 순위가 7위와 24위까지 올랐다. 상하이가 아직 10위권에 들지 못할 때였다. 하지만 우리가 과감한 변혁에 실패하면서 20위권 밖으로 밀리는 동안 글로벌 금융회사들을 대거 유치한 상하이는 5위권으로 치고 올라갔다. 국가적인 역량을 서울 한 곳에 집중해도 성패가 불투명한데 정치권이 부산과 전주까지 후보에 집어넣으면서 스스로 힘을 뺐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다수 투자은행(IB) 전문가들은 상하이가 금융허브로 주목받기 전인 2010년 전후를 우리나라가 동북아 금융허브를 만들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보고 있다.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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