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미국 국립보건원(NIH) 암연구소 시절 정기 평가에서 받은 질문이었다. 35년간 생명과학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였다. 당시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 후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 됐다.

그 답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찾은 것은 영국 생물물리학자로 X선 결정학을 통해 DNA 구조를 밝혀낸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전기를 읽으면서다. 책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베토벤이 작곡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작곡하지 못했겠지만, 과학적인 발견은 그 사람이 발견하지 않았더라도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발견했을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예술과 달리 과학은 특정인만 할 수 있는 창의적인 활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뭔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앞서간 과학자들이 세운 토대 위에 나의 노력이 가미돼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 또한 다음 세대 과학자들의 토대가 된다. 결국 나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도 든든한 토대가 있었다. 요즘 우리 회사에서 개발하는 한 항암제의 타깃인 ‘TGF-베타1’의 발견자, 아니타 B 로버츠 박사다. 나는 1987년 그의 연구실에서 박사후 과정을 시작했는데, 그는 당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의 과학자였다. 풋내기 과학자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가 진짜 존경받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젊은 과학자들에게 늘 따뜻하게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그에게 배운 젊은 과학자들은 대부분 성공적인 인생을 걷고 있다.

과학 전문 책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다. 새로운 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5년만 지나도 잊히기 십상이다. 로버츠 박사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TGF-베타1이라는 중요한 단백질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많은 제자는 그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기억한다. NIH에서 여러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됐으나 개인의 이름을 딴 정원이 캠퍼스 안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타 로버츠 명상가든’이 유일하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의 동의와 기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간의 기억은 결국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따뜻하게 해줬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이제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업적이 많은 과학자’가 아니라 ‘존경받는 멘토’로 기억되고 싶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