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개천절 차량집회 금지의 내로남불
생전에 민주주의에 관해 현대의 고전으로 불리는 책을 여러 권 쓴 로버트 달 미국 예일대 교수는 민주주의를 “평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민들의 선호에 부응하는 정부 형태”라고 간단히 정의한 바 있다. 시민을 평등하게 본다는 것은 ‘법 앞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고, 시민들의 선호에 부응한다는 것은 시민들이 바라는 바를 실행할 뿐 아니라 선호의 자유로운 형성과 전달도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와 시위의 자유 같은 각종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헌법을 포함해 모든 민주헌법은 이런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굳이 달 교수의 말을 빌린 것은 일부 보수단체가 계획하고 있는 10월 3일 개천절 도심 차량시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혹시라도 이런 평등과 자유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3중 검문소를 설치해 도심 진입을 차단하고 집회 참가자의 운전면허 취소·정지까지 하겠다며 원천봉쇄 입장을 밝혔다. 정세균 국무총리도 28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차량시위에 절대 불가 방침을 밝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완전히 진정되지 않아 많은 국민이 고통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감염 경로가 불분명한 새로운 감염원이 될 개연성이 있는 집회 개최는 자제해야 하고, 제한을 가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8·15 광복절 집회와 같이 방역수칙이 지켜지지 않는 일이 재연되게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회 추진 단체들이 제안한 카퍼레이드 식의 차량시위는 각자의 차량에 탄 시위자들이 차에서 일부러 내리지 않는 한 군중의 밀접 접촉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교통에 큰 불편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이 집회만이 아니라 도심에서 벌어지는 모든 집회가 다 그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천봉쇄 운운하는 대응은 헌법적 권리는 안중에 없거나 표면에 내세운 방역 이외의 고려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대목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지난 7월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대표의 석방을 촉구하는 차량시위는 허용됐다는 점이다. 주최 측 추산으로 2500여 대의 차량이 서울 서초구 염곡IC에서 세곡동 사거리까지 약 5㎞ 구간을 시속 10~20㎞ 속도로 이동했다. 당시 경찰은 “차량시위를 사전에 신고했고 전체 차선을 점거하지 않아 일반교통방해 등으로 처벌하기 어렵다”고 했다. 바로 이 때문에 정부가 국민을 둘로 갈라 우리 편은 되고 반대편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와는 사정이 달라졌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무관용의 으름장을 놓기 전에 먼저 왜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니까, 그동안 수많은 ‘내로남불’ 사례를 경험한 터라,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번 집회 금지를 주목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헝가리 폴란드 터키 등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 주로 쿠데타와 같은 극적인 사건을 통해 일어나던 과거의 퇴행과 달리 21세기판 민주주의의 퇴행은 ‘민주’의 탈을 쓰고 서서히 진행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이를 ‘도둑 권위주의(stealth authoritarian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변화 하나하나의 의미를 놓치기 십상이지만, 어느 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되돌리기에 너무 늦다.

한국에서도 ‘촛불’ 민심을 내세운 적폐청산, 친여 코드 판사들이 장악한 사법부, ‘개혁’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검찰 독립성 훼손, 친여 인사들이 장악한 언론, 혹시라도 남았을 반대세력의 입마저 잠재우려는 공수처 설치 등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만일의 가능성을 우려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번 차량집회 금지도 고립된 사건이라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3년여 사이에 일어난 여러 일과 함께 놓고 보면, 코로나19의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민주주의의 숲이 병들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나무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