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지면 미국 중앙은행(Fed)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마찬가지로 국내 시장 참가자들은 한국은행 한마디 한마디에 주목하게 된다. 연 4회 국회에 제출되는 ‘통화신용정책 보고서’는 나올 때마다 관심을 모은다. 보고서를 정독하다 보면 통화정책 방향은 물론이고 ‘7인의 현자(賢者)’로 불리는 금융통화위원들의 깊은 생각도 가늠해 볼 수 있어서다.

하지만 어제 발간된 올해 세 번째 통화신용정책 보고서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한은이 정치한 분석과 논리보다는 정부 정책을 추종하는 듯한 인상을 짙게 풍겼기 때문이다. 큰 논란을 부른 부동산대책과 재난지원금 정책 등을 단편적으로 접근한 점이 특히 실망스럽다. 보고서는 “주택시장 안정 대책 등의 영향으로 8월 들어 집값 오름세가 축소됐다”며 “이런 대책이 가격 상승 기대와 주택시장으로의 자금 쏠림을 완화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썼다. 중산층과 서민을 투기꾼 취급하며 규제로 일관하다 집값 급등과 전세 품귀라는 대혼란에 빠진 현장 분위기와 동떨어진 평가다. 국민은행에 비해 표본이 적은 데다 시세반영 시점도 늦은 한국감정원의 데이터를 별다른 고민 없이 인용하고 기계적으로 분석한 결과일 것이다.

포퓰리즘 논란을 부른 재난지원금이 “민간소비 회복에 기여할 것”이라는 진단도 ‘돈을 뿌리면 소비가 는다’는 식의 평면적 접근이다. 대규모 적자국채 발행으로 국채금리가 오르고 외국인 선물 투매를 불러 ‘통화정책 무력화’ 우려까지 나오는 판국이다. 금리 상승이 서민·자영업자의 이자를 늘리고 재정건전성을 훼손하는 등 복합적인 파장에 대한 고민도 안 보인다.

Fed의 제롬 파월 의장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벤 버냉키 의장은 시장과의 교감을 위해 대통령과의 대립도 불사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최고 경제 싱크탱크’를 자처하는 한은의 행보는 우려스럽다. 이번 통화신용정책 보고서만이 아니다. 적자국채 급증,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재정 확대, 실업 급증 등 경제현안은 쌓이는데 제대로 된 분석과 정책 대안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작년 이맘때 국회에 출석해 성장률 전망을 낮추면서 국내 정책실패는 언급하지 않고 미·중 무역분쟁을 원인으로 꼽기도 했다. 위기에 ‘한은이 안 보인다’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